졸업 후 52년 동안 한 번도 못 본 친구 등 고등학교 동기들을 ‘격조 있게’ 만난다고 아침 9시쯤 집을 나와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으로 가던 며칠 전이었습니다. 남은 게 시간뿐이라 지하철역까지 나무와 꽃으로 잘 꾸며 놓은 개천 따라 30분쯤은 걸어갑니다. 5월 신록 속 아침 길은 참 신선하지요. 나무는 푸르지, 개천은 맑지, 공기는 상쾌하지, 햇살은 부드럽지, 두 다리는 튼튼하지, 간혹 산책하는 사람들 행복해 보이지….
이처럼 즐겁고 충만한 기분으로 걸어가는데, 몇 걸음 앞에서 빠른 걸음으로 걷던 할머니 한 분이 갑자기 멈추고는 뒤를 돌아봅니다. 수수하지만 깔끔한 차림에 제법 무거워 보이는 쇼핑백과 이것저것 넣을 수 있는 큼직한 외출 가방을 양손에 나눠 들었습니다. 반대편 개천 길에서 조금 전 다리를 건너 내 앞길로 꺾어 들어선 분입니다. 할머니, 돌아보는 얼굴에 ‘짜, 증’ 두 글자가 선명했습니다. 입술을 달싹이며 중얼거리는데, 좋은 말씀을 하시는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나도 고개를 돌려 뒤를 봤습니다. 나보다 젊지는 않을 영감님 한 분이 천천히 오고 있더군요. 낡았지만 짙은 회색 재킷 차림에 검정 구두를 신었고 뭔가 잔뜩 든 쇼핑백을 한 손에 들고 있었습니다.
금방 파악되는 상황이었습니다. 할머니, 어딘가 시간 맞춰 가야 하는데 이미 늦었습니다. 하지만 바쁜 건 할머니 마음뿐, 영감님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세월아 네월아’입니다. 할머니만 서두르는 것이 필시 친정 모임입니다. 여고 동창 모임일 수도 있겠으나 친정 모임보다는 가능성이 떨어집니다. 내게 비슷한 경험이 있어서 이런 상상/추측을 하는 거라고 상상하지는 마세요. 소설이나 드라마에 비슷한 설정이 자주 있지 않나요?
어떻든, 지하철역까지 5~6분 더 가는 동안 할머니, 대여섯 번은 더 멈춰서 뒤돌아봅니다. 기껏 기다렸다가 함께 걸어갈라치면 영감님 또 처집니다. 지난밤에 자신 술 때문에 기력이 안 되는 것 같기도 합니다. 뒤처져 걷는 영감님, 어쩌면 젊었을 때를 생각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아내가 제대로 못 따라온다고 뒤돌아보며 소리 지르거나 삿대질하면서 펄펄 뛰었던 때. 사실 옛날에는 그런 장면 많았지요. 중절모에 두루마기 입은 남편은 저 앞에 혼자 가고, 아이 하나는 업고 하나는 손잡고 보따리까지 든 아내는 뒤따라가는 시골길. 하지만 인생만사 다 그렇듯, 부부관계에도 이런 역전은 있는 법이지요.
할머니, 종종걸음으로 지하철 역사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앞까지 먼저 왔으나 영감님 오기 전에 문 닫힌 엘리베이터는 휙 내려가고, 기다렸다가 올라온 거 함께 탔지만 시간 지나야 닫히는 자동문이라 또 기다려야 했지요. 이래저래 영감님 밉기가 한량이 없습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후 그 할머니 더 보지 못했으나 끝까지 나랑 길이 겹쳤다면 속 뒤집힐 일이 또 있었습니다.
국립박물관까지 가는 지하철을 갈아타야 할 곳에 막 도착하니까 아뿔싸, 코앞에서 전동차 문이 닫힙니다. 다음 거 타려고 기다리는데 스크린도어가 스스르 열립니다. 뛰어들려는데 또 코앞에서 닫힙니다. 출발했어야 할 열차가 못 떠나고 있습니다. 주변이 소란스러워 돌아보니까 양복 잘 차려입고 넥타이도 맨 오십 줄쯤 되는 사내가 “내가 타기도 전에 왜 멋대로 문이 닫히냐?”는 표정으로 스크린도어를 걷어차고 있었습니다. 결국 열차 문이 열리더군요. 스크린도어가 두 번 열린 건 그날 처음 봤습니다. 그 사내 덕분에 나도 타기는 했지만 사람이 어쩌면 저렇게 불량스러울까라는 생각을 한참이나 했습지요.
하지만 그 사내는 오늘 이야기의 큰 줄기는 아니니까 여기서 그치고, 원래 하려던 이야기로 돌아가겠습니다. 친구들 만나 추억 나누면서 박물관으로 들어섰습니다. 다섯 명이었는데 금세 두 명, 세 명, 혹은 네 명, 한 명씩으로 나누어졌습니다. 관심거리가 달랐던 거지요. 나는 ‘백제실’에 전시된 ‘숙세가’ 한글 번역문 앞에서 친구들과 헤어졌습니다. ‘숙세가’는 한자로는 ‘宿世歌’입니다. ‘전생의 노래’라는 뜻인데, 백제 때 목간(木簡)에 적혀 있었지요. 길이 12.7㎝인 이 목간은 2000년 11월 부여 능산리 절터에서, 파묻힌 지 1500여 년 만에 우리 앞에 나타났습니다.
전문이 ‘宿世結業 同生一處 是非相問 上拜白來(숙세결업 동생일처 시비상문 상배백래)’인 숙세가 번역은 두 가지입니다. “전생에 맺은 인연으로/이 세상에 함께 났으니/시비를 가릴 양이면 서로에게 물어서/공경하고 절한 후에 사뢰러 오십시오”라는 ‘사랑을 다짐하는 노래’로 받아들이는 사람과, “전생에 맺은 업으로/같은 곳에 태어나게 해주소서/잘잘못을 따지려 하신다면/위로 절하고 사뢰오리다”라는 ‘소원을 청하는 발원문’으로 풀이하는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중앙박물관 백제실에 전시된 한글 번역은 사랑을 다짐하는 숙세가입니다. 이 백제시대 사랑노래 마지막 구절 “공경하고 절한 후에 사뢰러 오십시오”라는 구절이 스쳐 지나갈 뻔한 내 발길을 붙잡았습니다. ‘공경’ 두 글자 때문이었지요. 그건 또 동네 개천 길에서 본 그 노인 부부 때문이었고요. 그분들과 헤어진 후 나는 ‘夫婦相敬’과 ‘夫婦相輕’, 동음이의어를 좀 생각했습니다. 둘 다 ‘부부상경’이지만 앞엣것은 “부부는 서로 공경해야 한다”, 뒤는 “부부가 서로 우습게, 가벼이 본다”이니 정반대입니다. (夫婦相敬은 ‘夫婦有別 相敬如賓’-부부는 유별하니 서로 손님 대하듯이 하라-라는 가르침에서 나온 말이라고 합니다.)
1500년 전 백제 때에도 ‘相敬’보다는 ‘相輕’하는 부부가 더 많았던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한자 원문에서 ‘경(敬)’ 자를 찾았으나 없었습니다. 원문에 없는 ‘공경’을 넣어 번역한 것이, 번역자도 나처럼 ‘相敬’보다는 ‘相輕’할 때가 더 많았나라는 객관적이지 못한 추측을 하면서 앞으로 먼저 간 친구들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그저께 이 글을 쓰고 있는데, 누가 “오늘은 5월 21일, 이날 하루라도 부부는 눈빛은 그윽하게, 말은 부드럽게, 마음은 따뜻하게 서로 대하라는 ‘부부의 날’입니다”라고 알려주었습니다. ‘많이 남지 않은 남은 삶에서라도 相敬하라는 하늘의 뜻이런가. 그래서 오늘 이런 글을 쓰고 있는 건가?’라는 또 객관적이지 못한 생각이 잠깐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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