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저희뿐 아니라 모든 대형 회계법인이 비슷한 상황일 거예요. 2020년부터 시장에 돈이 풀려 인수합병(M&A) 자문 업무, 컨설팅 업무 등이 급증하자 인력을 잔뜩 뽑았죠. 이때는 인건비가 늘어나도 그만큼 버니까 문제가 안 됐어요. 근데 아시다시피 지난해부터 고금리와 불확실성 확대에 시장이 확 죽고 일거리가 사라지면서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시킬 일도 없는데 나가지도 않는 직원을 어떻게 굴릴지가 관건이 된 거죠.
회계법인 관계자
시장 침체가 길어지면서 일감이 대폭 줄어든 주요 회계법인이 인력을 어떻게 재배치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다. 2년 전만 해도 5년 차 회계사에 연봉 1억원을 줄 정도로 호황이었는데, 이때 앞다퉈 영입했던 이들이 소위 ‘놀게’ 생기면서다. 빅4 회계법인은 예전에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1000억원 이하의 작은 딜(Deal·거래)까지 모조리 뛰어들고 있지만, 그래도 잉여인력이 많다고 한다. 신입 회계사들에게 업무를 주는 대신 인공지능(AI) 교육을 받게 하는 등 내보낼 수 없는 인력을 나중에라도 더 잘 활용할 방안까지 궁리하는 모습이다.
21일 회계업계에 따르면 현재 가장 문제가 되는 분야는 딜과 컨설팅이다. 경기가 하락세를 타면서 기업들이 돈주머니를 닫자 M&A 딜(거래) 수와 규모가 꺾였고 컨설팅 수요도 감소했다. 올해 1분기 M&A 시장은 조(兆) 단위 딜이 한 건도 없는 등 거래 규모가 급격히 쪼그라들었다. 금융 자문 시장은 최근 1년간 고금리 상황 속에서 거래 금액이 84.3% 급감했다.
특히 부동산 호황기에 파트너와 주니어 인력을 대거 늘린 것이 독이 됐다. 한 대형 회계법인 관계자는 “부동산 시장이 빠르게 식으면서 애써 갖춘 부동산 담당 조직이 사실상 개점휴업 상태”라면서 “비싼 돈을 주고 데려온 인력을 놀릴 수는 없으니까 이전에는 거들떠도 안봤던 작은 딜에도 투입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삼일·삼정 등 국내 대형 회계법인은 올해 들어 작은 딜에 집중했다. 올해 1분기 다른 자문사가 1~2건을 수임할 때 삼일PwC와 삼정KPMG는 총 42건을 맡았다. 점유율도 68.82%를 차지했다. 이들 외 크레디스스위스, 모건스탠리 등 글로벌 투자은행(IB)을 비롯한 자문사는 모두 금융 자문 거래를 1~2건 수임하는 데 그쳤다.
부동산 시장에 전문성을 갖췄다는 이유로 대거 영입한 비회계사 인력도 골치다. 당시 대형 회계법인은 경쟁적으로 부동산 관련 조직을 키우며 비감사 부문 강화라는 목표를 달성하고자 했다. 그러나 부동산 거래가 거의 사라진 지금은 짐이 될 뿐이다. 이들 상당수가 회계사 자격증이 없다 보니 감사나 실사 등 다른 업무를 맡기기도 어려운 탓이다.
또 다른 대형 회계법인 관계자는 “시장이 좋을 때는 신입 100명을 뽑으면 실무자 50명이 나간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이직이 활발했는데, 요즘은 직원들이 나가지 않아서 고민이라는 말도 나온다”면서 “파트너에게 가해지는 실적 압박이 커진 것은 물론 부진한 조직을 축소하는 움직임도 보인다”고 말했다.
직원들이 퇴사하지 않는 이유는 마찬가지로 불황 때문이다. 벤처 거품이 꺼지면서 스타트업으로 옮기려는 회계사가 줄었고, 대기업 채용도 감소했다. 갈 곳이 없으니 눈칫밥을 먹으면서라도 버티기에 들어간 상황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이참에 직원 능력 계발에 나서는 곳도 있다. 회계업계에도 AI 열풍이 불었는데, 관련 교육을 많이 받게 하는 식이다. 어차피 일거리가 없으니 이럴 때 능력이라도 키우게 하자는 것이다. 실제 주요 회계법인들은 신입 회계사에 대한 교육이 이전보다 강화됐다는 평을 내놓고 있다.
회계법인들은 감사·재무자문·컨설팅 등 전문가들이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이익을 낸다. 거대 설비를 둘 필요도 없다. 인건비 비중이 큰 만큼, 어느 정도 규모의 인건비를 지급했는지가 실적에 중요한 변수가 된다. 이 때문에 올해 회계법인 실적도 지난해에 이어 밝지 않을 것이란 전망이 제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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