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기업 밸류업(기업가치 제고) 정책을 추진하고 있지만 우리나라 자본시장의 후진적 관행은 여전하다는 평가가 나온다.
특히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이 국내 자본시장에 성공적으로 안착하려면 무엇보다 상장사들의 감시자 역할을 하는 국민연금공단과 자산운용사가 제대로 의결권을 행사해야 하지만 여전히 이들의 의결권 방향은 불투명하다는 지적이다.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은 20일 논평을 통해 국민연금 및 국내 자산운용사들이 적극적으로 의결권을 해사하고 행사 내역을 상세히 공시해야한다고 촉구했다.
거버넌스포럼은 논평을 통해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 과정에서의 절차적 하자로 인해 메이슨캐피탈과 엘리엇 등이 제기한 국제소송에서 한국 정부가 연이어 패소하며 수천억 원의 혈세를 낭비하게 됐다”고 지적했다.
앞서 지난 15일 법무부는 미국계 헤지펀드 메이슨 캐피탈의 ‘투자자–국가 분쟁해결절차(ISDS)’ 사건 판정문을 공개했다. 판정문에 따르면 국제상설중재재판소(PCA) 중재판정부는 2015년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과정에 정부의 부당한 압력이 있었고 옛 삼성물산 주주인 메이슨 캐피탈이 손해를 봤다고 설명했다. 중재판부는 지난달 11일 한국 정부가 메이슨에 약 438억원과 지연이자를 지급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메이슨캐피탈뿐만 아니라 당시 삼성물산 주주였던 엘리엇 매니지먼트도 삼성물산에 약정금 지급 소송을 제기한 상태다. 국내 삼성물산 주주들의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도 진행 중인 상황이다.
이에 대해 거버넌스포럼은 “국민연금은 국민의 노후자금과 직결되는 중대한 대규모 합병에 찬성하면서 구체적인 의결권 행사 사유 및 근거를 공개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어 “올해 주주총회에서도 국민연금은 정부가 대주주인 기업은행이 KT&G를 상대로 주주제안을 한 안건과 이사회와 주주가 합의를 이룬 태광산업, 캐스팅보트를 쥐지 않은 DB하이텍 일부 안건 등을 제외하면, 삼성물산, JB금융지주, 금호석유, 한미사이언스의 주주제안 안건을 모조리 반대했다”고 설명했다.
국민연금은 KT&G, 태광산업 등의 주주제안 안건에 반대하면서 이사회 안이 장기적인 주주가치에 더 부합한다는 짤막한 이유를 내세웠다. 논평은 “어떤 근거로 이사회 안이 주주제안보다 장기적은 주주가치에 더 부합한다고 판단했는지에 대한 설명이 없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깜깜이 의결권 행사는 자산운용사도 마찬가지다. 거버넌스포럼은 “상당수의 자산운용사들이 자체 의결권 행사 기준에 못 미친다는 이유(펀드 내 보유비중이 작다는 이유 등)로 의결권 행사를 포기한다”며 “이는 수탁자로서의 의무를 방기하는 것과 다름없다”고 지적했다.
거버넌스포럼이 포럼 회원사와 함께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의결권 행사내역을 공시한 주식운용 금액 기준 상위 10개 자산운용사들의 주주제안 찬성률은 갈수록 줄고 있는 상황이다. 2022년에는 주주제안 찬성률이 60%에 달했는데, 2023년에는 32%, 2024년에는 23%로 감소했다.
특히 일부 주요 운용사들의 2024년 주총 주주제안 찬성률은 0%인 경우도 있을 정도로 극히 낮았다.
거버넌스포럼은 주주제안 찬성률이 낮은 것과 함께 의결권 행사시 구체적인 사유와 근거를 제시하지 않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대부분 국민연금처럼 의결권 행사 이유를 짤막하게 한 줄 정도로 보여주고 있었다.
이는 해외 연기금 및 운용사들의 의결권 행사와는 다른 모습이다. 거버넌스포럼은 “약 2000조 원을 운용하는 세계 최대 연기금 일본 공적연금(GPIF)은 위탁운용사들이 의결권을 적극적으로 행사하고 상세 내역을 공시하도록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GPIF가 발간한 통계(2022년 4월~2023년 3월)에 따르면 일본 국내주식 대상 주주제안 안건 중 외부감사 선임의 건에 대한 자산운용사의 찬성률은 43%에 달한다”며 “특히 이사회안에 대부분 찬성하는 한국과는 다르게 이사의 퇴직금 관련 이사회 안건에 대해서는 반대율이 무려 87%에 달했다”고 덧붙였다.
거버넌스포럼은 “정부가 최근 기업거버넌스 개혁을 위해 밸류업 정책 등 여러 주주친화적인 정책을 시행하고 있는 것은 매우 긍정적이지만 모든 것은 기본에서 출발해야 한다”며 “기업의 밸류업을 위해서는 주주들의 관심과 참여가 가장 기본이며, 이는 수천만, 수백만 국민의 자금을 운용하고 있는 국민연금과 자산운용사들이 가장 신경 써야 할 부분”이라고 말했다.
아울러 “깜깜이, 무논리, 무근거 의결권 행사로 국민의 소중한 자산이 녹아 없어지지 않도록 국민연금과 자산운용사들이 성실하게 의결권을 행사하고 행사 근거를 충실히 공시할 수 있도록 유도하고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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