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든 정부가 밀어붙인 반도체지원및과학법(CHIPS법, 이하 반도체법) 영향으로 오는 2032년이면 국제 시장에서 미국의 반도체 생산 비중이 지금의 3배 수준으로 크게 증가하리라는 전망이 나왔다.
한국의 반도체 점유율도 소폭 상승하지만, 반도체 경쟁의 핵심인 첨단 반도체 생산 능력은 지금의 3분의 1 수준으로 급감할 것으로 예상됐다. 반도체 시장 경쟁의 핵심이 첨단 반도체임을 고려하면, 한국 경제가 크게 의존하는 첨단 반도체 시장에서 한국은 궤멸적인 타격을 입으리라는 예상이 가능한 대목이다.
8일(현지시간) 미국 반도체산업협회(SIA)와 보스턴컨설팅그룹(BCG)은 이 같은 내용을 담은 ‘반도체 공급망의 새로운 탄력성’ 보고서를 내놨다.
미국 10nm급 반도체 생산력 0%→28%
보고서를 보면, 첨단 기술인 10나노(nm) 이하 반도체 생산 능력이 반도체법 제정 당시인 2022년 0%이던 미국의 생산 비중은 그로부터 10년 후인 2032년에는 28%로 급증할 것으로 예상됐다. 이에 따라 미국은 대만(31%)에 이어 첨단 반도체 부문 2위 생산국이 될 것으로 전망됐다.
보고서는 “(반도체법에 따라) 민간 분야는 2024~2032년 사이 웨이퍼 제조에만 약 2조3000억 달러를 투자할 것으로 예상된다”며 “이는 반도체법 제정 이전 10년간(2013~2022년) 7200억 달러만 투자된 것과 대비된다”고 밝혔다.
바이든 정부는 지난 2022년 8월 미국 내 반도체 제조 회사에 총 390억 달러의 보조금을 지급하고 25%의 투자 세액 공제(ITC)를 지원하는 등 총액 520억 달러의 투자를 골자로 하는 반도체법을 마련했다. 이 중에는 첨단 공정 연구·개발 지원 110억 달러, 국방 분야 투자 20억 달러 등의 세부 안이 포함돼 있다. 미국 정부는 올해 연말까지 반도체법으로 할당한 390억 달러 보조금을 전액 집행할 예정이다.
이 법안에 따라 미국 내 투자를 결정한 삼성은 약 60억 달러 규모의 보조금을 받고 TSMC는 50억 달러가량을 지원받는다. 보조금 총액 4분의 1이 넘는 100억 달러를 미국 업체인 인텔이 홀로 챙겼다. 애초 반도체법이 경제적 목적 외에도 안보 강화를 목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해외 생산 반도체의 미국 수입을 제한함에 따라 해외 메이커는 어쩔 수 없이 미국에 투자해야 한다. 이들과 경쟁 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미국 정부가 인텔에 거액을 지원하는 모양새다.
보고서는 반도체 생산 능력이 동아시아에 집중된 현 상황을 위험으로 보고 공급망을 강화하기 위해 반도체법이 설계됐다고 밝혔다.
보고서는 “반도체는 차량과 모바일 기기에서 데이터 센터, 의료 장비, 청정 기술, 그리고 물론 다가오는 인공지능(AI) 혁명에 이르기까지 경제에 동력을 제공한다”며 “1980년대 이후 선구자였던 미국의 반도체 제조 능력은 일본과 동아시아로 이동했으나 “미국은 장비와 칩 설계에서 여전히 우위를 유지”했다고 전했다.
그러나 “메모리에서는 한국이, 다른 모든 반도체 파운드리에서 대만이 부상했다”며 생산능력이 동아시아로 이전한 결과 “(반도체 산업의) 빠른 발전과 전문화가 가능했으나 (한국, 대만으로의) 공급망 집중으로 이어졌다”며 보고서는 이러한 위험을 완화하기 위해 미국으로의 반도체 생산 능력 이전이 필요했다고 설명했다.
반도체법이 통과함에 따라 이제 “복원”이 이뤄진다고 보고서는 밝혔다. 보고서는 “넓게 말하자면 공급망의 지리적 다각화 개선”을 복원으로 정의했다. 미국뿐 아니라 일본, 유럽, 중국 등에서도 반도체 생산능력이 강화되리라는 설명이다. 이는 반대로 한국과 대만의 호시절이 끝나가고 있다는 뜻으로도 해석된다.
이와 관련해 미국뿐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도 반도체 생산 능력 강화를 위한 대책이 마련됐다. 유럽연합(EU)은 유럽 반도체법을 제정했고 중국은 지난 2014년(1389억 위안)과 2019년(2000억 위안)에 이어 역대 최대 규모로 세 번째 IC 산업 투자 펀드(반도체펀드)를 조성하기로 했다. 외신은 3차 펀드 조성 규모를 270억 달러 수준으로 추측한다.
한국 첨단 반도체 점유율 31%→9%
반도체법에 따라 현재 한국, 대만 등 일부 국가에만 집중된 최첨단 웨이퍼 생산 능력이 2032년이면 “대만을 넘어 한국, 미국, 유럽, 일본 등으로 다변화할 것”으로 보고서는 예상했다.
특히 보고서는 “2022년부터 2032년 사이 미국의 반도체 공장(팹)은 203% 증가해 세계에서 가장 큰 폭으로 성장할 것”이라며 “그 결과 미국은 수십 년에 걸친 하향세를 반전해 현재 10%인 전 세계 팹 비중을 2032년이면 14%까지 끌어올릴 것”이라고 진단했다. 아울러 반도체법이 없었다면 미국의 팹 점유율은 2032년 8%까지 떨어졌을 것이라고도 덧붙였다.
반도체법 하나로 인해 미국의 반도체 생산 능력이 지금의 3배 수준으로 급증하는 셈이다.
현재 반도체 산업의 글로벌 공급망은 설계, 핵심 설계자산(IP), 반도체 설계 자동화(EDA) 분야는 미국이, 관련 장비는 미국과 EU, 일본이, 소재 분야는 중국과 일본, 대만, 한국이, 그리고 첨단 반도체 생산은 대만과 한국이, 후공정(ATP)은 중국과 대만이 각각 주요국으로 나뉘어 있다. 이런 글로벌 분업 체제가 앞으로 크게 변화할 것으로 예상된다.
보고서는 “앞으로 △웨이퍼 제조, 특히 고급 로직 분야와 △ATP의 두 가지 분야에서 주로 지리적으로 상당한 다양화가 예상된다”며 미국의 경우 “2020년부터 2023년 말까지 미국 전역에서 80개의 새로운 반도체 제조 프로젝트가 발표되었으며, 이 프로젝트는 5만 개의 직접적인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할 것”이라고 밝혔다.
유럽 또한 반도체 투자를 강화하면서 생산 능력을 강화할 것으로 전망됐다. 지난 2020년 이후 유럽에서는 주요 웨이퍼 팹의 7대 투자가 발표됐다. 그 대부분은 인텔의 마그데부르크 투자, TSMC의 드레스덴 투자를 포함해 동부 독일에 집중됐다. 프랑스 남부와 폴란드에도 2032년까지 대규모 투자가 예정됐다.
이 가운데 특히 10nm 이하의 첨단 반도체 생산 공정에서 앞으로 큰 변화가 예상됐다.
보고서는 “2030년이면 ‘최첨단’ 용량의 정의는 (지금의 10nm가 아니라) 3nm급이 될 것”이라며 “앞으로는 첨단 기술의 거의 70퍼센트가 10nm 미만 기술로 제조된 반도체에 의존하면서 (첨단 반도체) 생산비가 훨씬 비싸질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이 같은 첨단 반도체 생산 능력이 “2022년에는 한국과 대만(한국 31%, 대만 69%)에 거의 백퍼센트 분포했으나 2032년이면 이 중 40퍼센트 이상이 (한국과 대만) 지역 바깥으로 이동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특히 “미국은 2022년에는 (10nm 이하급) 첨단 반도체를 거의 생산하지 못했으나 2032년이면 10nm 이하 신공정에서 전체 칩의 거의 30퍼센트를 생산할 것”이며 “유럽과 일본이 10nm 이하 첨단 반도체의 12%가량을 생산할 것”으로 예상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2022년 현재 전체 반도체 가치 사슬(밸류 체인)에서 미국은 지금도 설계 등 첨단 분야의 압도적 경쟁력에 따라 38퍼센트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EU와 대만, 중국은 각 11퍼센트, 일본과 한국은 각 12퍼센트의 가치 비중을 가진다.
이에 미국이 생산능력마저 되찾게 되면 미국의 반도체 부문 지배력은 압도적 수준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는 한국에는 특히 악재다. 보고서에 따르면 2032년 10nm 이하 첨단 반도체 생산에서 미국의 점유율은 28퍼센트에 이를 정도로 커지지만 대만의 비중은 2022년 69퍼센트에서 2032년 47퍼센트로 줄어들 것으로 예상됐다.
한국의 타격이 가장 극심했다. 같은 기간 31퍼센트인 점유율이 9퍼센트로 급락하는 것으로 예상됐다.
존재감이 없던 EU의 점유율이 0퍼센트에서 6퍼센트로 커지고 일본은 0퍼센트에서 5퍼센트로, 중국이 0퍼센트에서 2퍼센트로 비중을 각각 늘리는 것으로 전망됐다.
대만과 한국의 첨단 기술 독점 체제가 깨지면서 특히 한국이 가장 큰 타격을 입게 되는 셈이다.
2022년에서 2032년 사이 10~22nm급 시장 점유율은 미국이 28퍼센트에서 20퍼센트로 줄어들고, 대만은 40퍼센트에서 29퍼센트로 줄어드는 반면, 한국은 4퍼센트에서 6퍼센트로 비중이 오히려 커질 것으로 예상됐다. 첨단 기술이 아닌 공정에서 한국의 비중이 소폭이지만 커지는 셈이다.
디램(DRAM)과 낸드플래시 분야에서는 한국의 우위가 유지될 것으로 전망됐다. 한국의 디램 분야 점유율은 2022년 52퍼센트에서 2032년 57퍼센트로, 낸드 부문 점유율은 같은 기간 30퍼센트에서 42퍼센트로 커질 것으로 예상됐다.
이 같은 변화로 인해 각 반도체 사업의 종합적인 생산력을 보면 한국의 점유율은 2022년 17퍼센트에서 2032년 19퍼센트로 증가할 것이 예상됐다. 대만은 18퍼센트에서 17퍼센트로 줄어들고 일본은 17퍼센트에서 15퍼센트로 줄어들 것이 전망됐다. 미국은 10퍼센트에서 14퍼센트로 점유를 늘리고 중국의 점유율은 24퍼센트에서 21퍼센트로 변화할 것이 예상됐다.
한국의 경우 첨단 기술 시장에서 경쟁력을 상실하고 종합적인 위치에서는 디램 등 분야의 경쟁력에 따라 지위가 소폭 상승하는 셈이다. 결국 한국은 여전히 시장 변동성이 큰 위험을 가진 디램과 낸드 부문의 압도적 우위만 유지할 뿐, 첨단 공정 경쟁에서는 밀려나는 셈이 된다.
주요국의 반도체 생산 용량은 2022년에서 2032년 사이 80퍼센트 이상 증가할 것으로 예상됐다. 한국의 생산 용량은 90퍼센트에서 129퍼센트로, 대만은 67퍼센트에서 97퍼센트로 증가하고 특히 미국은 11퍼센트에서 203퍼센트로 급증할 것이 예상됐다.
SIA “인재 확보 집중해야…해외 인재 영입이 열쇠”
보고서는 앞으로 반도체 시장에서 대규모 투자가 이어지는 만큼, 인재 확보에 집중할 것을 주문했다.
보고서는 “2023년 7월 옥스퍼드 이코노믹스와 협력한 SIA의 연구에 따르면 미국은 기술자, 컴퓨터 과학자 및 엔지니어의 상당한 부족에 직면했다”며 “2030년까지 이 부문 노동자 6만7000명이 부족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밝혔다.
또 팹 건설 등에 필요한 건설 노동자, 전기 기술자, 용접공, 배관공 등에서도 인재 부족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경고했다. 보고서는 “2023년 37만5000명의 전문 인력 수요가 있었던 용접 산업의 전체 노동자 평균 연령이 42세인 가운데, 55세 이상의 수많은 고령 노동자는 은퇴하고 있다”며 “이러한 (숙련도의) 노동자가 없으면 반도체 제조 능력을 유지하고 운영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이에 보고서는 해외 인재 영입을 적극 주문했다.
보고서는 “외국인 인재를 환영하는 것은 여러 지역에 걸친 인재 부족과 잉여의 격차를 해소하는 열쇠”라며 “미국에 기회는 종합적인 외국인 인재 보유율을 높이는 데 있다”고 밝혔다. 보고서는 “SIA에 따르면 미국 공학대학 석사 졸업생의 50퍼센트 이상, 박사 졸업생의 60퍼센트 이상이 외국인”이라며 “미국에서 졸업하는 외국인 학생 중 약 80퍼센트의 석사, 25퍼센트의 박사 졸업생이 졸업 후에는 미국에 남아 있지 않다”고 지적했다. 이들을 붙잡아 고급 인력을 확충해나가야 한다는 조언이다.
보고서는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은 긴장과 복잡성이 고조하는 세계에 직면했다”며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반도체 제조에 필수적인 네온 가스 공급이 중단된 사태를 예로 들었다. 또 비군사적 경쟁도 위험을 높이는 요인이라며 지난 2019년 일본 정부가 한국을 상대로 한 불화수소, 불소 폴리아미드, 포토레지스트 등의 수출 규제를 꼽기도 했다.
보고서는 “반도체는 일상적인 제품에서 국방과 인공지능의 최첨단 기술에 이르기까지 앞으로 10년 동안 세계 경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며 “지정학적 긴장과 더 복잡한 규제 환경, 노동력 부족 및 비용 상승 등 여러 요인들이 공급망 다변화와 복원력 향상을 위한 투자의 필요성”을 보여준다고 강조했다.
한편 보고서는 한국을 두고 “2047년까지 4710억 달러를 투자해 삼성, SK하이닉스 및 기타 칩 제조사들이 참여하는 경기도의 메가 클러스터에 16개의 새로운 팹을 건설할 계획”이라고 전했다.
일본의 경우 “TSMC가 일본 구마모토의 제조 능력을 높이기 위해 소니, 덴소, 도요타와 협력하고 있으며, 일본 관계자들은 국내 스타트업 라피더스가 홋카이도의 새로운 부지에 최첨단 2나노미터 칩 생산 라인을 세우는 것을 돕고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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