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미국 정부가 중국산 흑연이 들어간 전기차에도 보조금*을 지급키로 하면서 한국 배터리 업계가 한고비를 넘겼습니다. 보다 정확히는 흑연에 대한 미국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해외우려집단(FEOC) 규정 적용이 ‘2년간 유예’ 된 거죠. 그간 협회와 업계가 요구해왔던 ‘일정 기간 유예’가 받아들여진 모양새입니다.
*미국 정부는 소비자가 전기차를 구매할 때 세액공제 방식으로 보조금을 지원합니다. 수량 제한 없이 전기차 1대당 최대 7500달러가 지원됩니다. 2032년까지 지원이 이어질 계획이며 이에 약 1450억 달러를 지출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미국은 IRA에 따라 전기차 등 청정 에너지 산업에 세액공제를 제공하고 있는데요. 그 가운데 ‘FEOC 규정’은 중국·북한·이란·러시아 등 국가 정부의 소유·통제·관할 지시를 받는 기업 지분이 25% 이상일 때 세액공제를 제한하는 것이 골자입니다.
당초 배터리 부품은 올해부터, 배터리 핵심광물은 내년부터 해당 제재를 받을 예정이었습니다. 이 경우 가장 문제가 되는 게 ‘흑연’이었습니다. 흑연은 전기차 배터리 음극재의 필수 광물인데요. 글로벌 시장 내 중국의 흑연 생산 비중이 80% 수준인 데다, 지난해 기준 한국의 대중 수입 비중은 천연흑연과 인조흑연 모두 95%를 넘었습니다.
현재 36종인 IRA 보조금 수혜 모델 가운데 30종 모델이 K-배터리를 사용하고 있는데, FEOC 규정에 의해 내년 1월 1일부터 중국산 흑연 사용이 금지되면 보조금 수혜 모델은 하나도 없을 것이란 우려도 나왔죠. 이는 곧 전기차 및 배터리 수요 감소로 이어질 것이 자명했습니다.
‘흑연은 원산지 추적 불가능’…명분 살펴보니
다행히 미국 정부의 이번 결정으로 한국 배터리 업계는 한 시름 놓을 수 있게 됐습니다. 사업적 환경 불확실성을 크게 낮출 것이 분명하죠.
다만 일각에선 유예 배경에 대한 논리적 타당성이 다소 부족하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앞서 산업통상자원부는 미국 정부의 최종 가이던스 주요 내용을 언급, 2년간 유예가 결정된 까닭에 대해 “배터리 음극재에 사용되는 흑연이 ‘원산지 추적이 불가능한(impracticable-to-trace) 소재’로 분류됐다”고 발표했는데요.
발표 내용과 달리 학계 및 연구계 전문가들은 “천연흑연과 인조흑연 모두 원산지 추적이 가능하다”고 설명합니다. 제조 공법 특성상 케미컬을 산·염기에 녹여 완전한 활물질로 바꾸는 양극재와 달리, 음극재는 흑연의 광물 성질을 유지한 상태에서 활물질을 만들다 보니 원산지 추적이 비교적 쉽다는 겁니다.
‘흑연은 원산지 추적이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유예가 결정됐다면, 논리적 타당성을 근거로 번복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까닭입니다.
또 다른 한편에선 “한국 정부 및 기업의 요구사항을 미 정부가 수용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만든 개념일 것”이란 해석도 나옵니다. 양국 간 외교과정에서 서로의 실익을 위한 판단일 것이란 얘기입니다.
앞서 설명했듯 FEOC 규정이 내년부터 당장 적용되면 전기차 보조금을 받을 수 있는 모델은 사실상 없어질 가능성이 크고, IRA 전기차 보조금은 미국 내에서도 유명무실해질 수 있었으니까요.
남은 시간 ‘최대 2년’…탈중국 가속페달 밟는다
당장 큰 산은 넘었지만 해결해야 할 과제는 아직 남아있습니다. 우선 올해 11월 미국 대선이 관건입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당선될 경우 한국 배터리 업계가 맞닥뜨릴 변동성은 상당할 전망인데요. 흑연뿐 아니라 이외 광물까지 원산지 요건을 강화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다수 전문가들은 트럼프가 재선에 성공하면 IRA를 약화하기 위한 시도를 이어갈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세액공제를 축소하거나 세부조항을 개정하는 등 우회적 수단**을 동원할 것이란 관측입니다.
**트럼프 재선 시 IRA 폐지 가능성은 상대적으로 낮게 예상됩니다. 법안 폐지를 위해선 상하원 의회를 거쳐야 해 절차가 까다롭고요. 공화당 우세 지역 다수에 IRA 투자와 일자리 창출이 있었기에 정치적 지지기반 이탈 가능성을 고려해 강행하지 않을 것이란 전망이 지배적입니다.
이에 한국 배터리 기업들은 공급망 다변화 속도를 최대한 높이는데 주력할 것으로 보입니다. 트럼프 재선 가능성을 차치하고도 ‘2년’이란 시간만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일부 우려의 시선에도 불구, 업계는 “2년 내 공급망 다변화가 가능하다”는 입장입니다. 그간 정부와의 회담에서 ‘2년 내 성과를 거둘 수 있다’는 업계 측 강조가 있었고 정부 역시 이를 확인한 후 미국 측에 전달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정부도 탈중국을 위해 팔을 걷고 나섰습니다. 공급망 자립화 관련 국내 투자에 올해 9조7000억원의 정책 금융을 지원하는 등 금융·세제 및 인프라 지원을 강화하기로 했습니다.
아울러 인도·태평양경제프레임워크(IPEF), 핵심광물안보파트너십(MSP) 등 정부 간 협력 채널을 통해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정(FTA) 체결 국가에서 광물을 확보하기 위한 기업의 활동도 적극 지원할 계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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