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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완의 월드비전] 한배 탄 필리핀의 두 정치 명문가…. 헤어질 결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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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디난드 ‘봉봉’ 마르코스 주니어 필리핀 대통령/필리핀 데일리 인콰이어러] 

두 가문의 전략적 동맹 

지난달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TIME)은 페르디난드 ‘봉봉’ 마르코스 주니어 필리핀 대통령(66)을 ‘2024년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 중 한 명으로 선정했다. 그는 부패와 독재, 야당 탄압에 항거한 1986년 ‘피플 파워’ 혁명으로 축출될 때까지 20년 넘게 장기 집권했던 악명 높은 지도자 페르디난드 마르코스의 외아들로 2022년 대선에서 필리핀 17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무려 60% 득표에 가까운 압도적인 승리였다.  전임 로드리고 두테르테 대통령의 맏딸 사라 두테르테(45)는 한때 유력한 대권 후보로 떠올랐지만 결국 마르코스 주니어의 러닝 메이트로 출마해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북부 루손 지역의 대표적 정치 세력인 마르코스 가문과 남부 민다나오의 비사야를 대표하는 두테르테 가문의 전략적 동맹으로 차기 권력 분점까지 노린 포석이었다.    

두테르테 가문의 지원에 힘입어 대권을 거머쥔 마르코스 주니어는 중국에 몸을 낮추었던 두테르테 전 대통령의 외교노선을 어느 정도 이어갈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었다. 선거 기간 그는 두테르테가 중국과 긴밀한 관계를 모색한 것을 두고 선경지명이 있었다고 평가를 하기도 했다. 당선 직후 언론 인터뷰에서도 “미국을 끌어들이면 중국을 적으로 만든다”며 외교정책 전환에 조심스러운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지난해 5월 바이든 대통령 초청으로 미국을 방문한 이후 양국 간 동맹 강화에 속도를 내고 있다. 지난달에는 백악관에서 바이든 대통령,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사상 처음 3국 정상회의를 개최했다. 3국은 중국과 영유권 분쟁으로 긴장이 높아지고 있는 남중국해에서 해상안보 위협에 공동 대응하고 필리핀 북부 지역의 인프라 개선과 공급망 구축 등 경제협력을 강화해 나가기로 합의했다. 미국 주요 언론은 3국의 안보협력 선언을 두고 미국이 중국을 상대로 구축 중인 ‘격자형(lattice-like)’ 견제망이 완성됐다고 분석했다. 

마르코스 주니어 대통령은 재임 기간 미국을 한 번도 방문하지 않았던 두테르테와 달리 중국 대신 미국을 최우선 순방지로 택해 필리핀의 외교적 전통을 부활시켰다. 그는 대만 코앞에 있는 필리핀 군사기지 4곳에 대한 접근과 사용권을 미국에 추가로 허가하고, 양국 간 합동훈련도 실시했다. 일본과는 자위대 훈련 동참과 파견 협정까지 추진하고 있다. 또 두테르테 재임 기간에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합의한 것으로 추정되는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 관련 ‘밀약’을 문제 삼아 진상 규명을 공언하고 있다. 반면 두테르테 전 대통령은 퇴임 후에도 지난해 7월 시 주석과 만나 자신은 양국 간 우호협력을 추동하는 역할을 지속적으로 하고 싶다는 의사를 표명하기도 했다. 

미국에 필리핀은 지정학적으로 중국 견제를 위한 필수적 요충지다. 과거 바이든 대통령은 상원의원 시절 마르코스 독재정권의 부패와 인권 탄압을 비판하는 데 앞장선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정치는 현실이다. 남중국해에서 ‘9단선’이라는 가상의 바다 경계를 쳐 놓고 주변 국가를 위협하는 중국을 견제하고 이곳의 자유통행권을 보장하기 위한 다자간 안보협력체제를 강화하려는 바이든 행정부에 마르코스 주니어 대통령은 ‘천군만마’와 같은 존재일 것이다. 타임지는 마르코스 주니어를 ‘2024년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 중 한 명으로 선정하면서 그가 “남중국해에서 중국의 침략에 확고히 맞서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으며 지역과 전 세계 긴장 고조에 대응해 미국과 동맹을 강화해왔다”고 소개했다.  

필리핀 대선은 전통적으로 지역 엘리트 간 연합이라는 지역 구도가 중요한 요소다. 두테르테 전 대통령의 아버지는 1965년 마르코스 내각에서 행정비서관을 지낸 정치적 동지로 두 가문은 오래전부터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하지만 태생적으로 ‘우파’ 성향인 마르코스 가문과 ‘좌파’ 성향의 두테르테 가문은 물과 기름의 조합이다. 전략적 동맹으로 지난 대선에서 압도적 지지를 얻는 데 성공했지만 최근엔 외교 노선뿐 아니라 정치적으로 민감한 개헌 문제에서까지 충돌하면서 필리핀 정국이 술렁이고 있다. 특히 내년 상·하원 선거와 지자체장을 뽑는 중간 선거를 앞두고 있는 가운데 양측은 각자 지지 기반 구축에 나서면서 균열이 더욱 확대될 것으로 보인다.  

두테르테 전 대통령은 재임 기간 대통령의 6년 단임 제한을 4년 중임의 내각제로 헌법 개정을 추진하려 했지만 실패한 경험이 있다. 지금은 마르코스 주니어 정부가 외국인 투자를 늘린다는 명분 아래 개헌이 필요하다고 역설하고 있다. 국내 산업에 대한 외국인 지분을  40%로 제한하는 현행 헌법은 글로벌 시대에 필리핀의 경제성장을 가로막고 있다는 것이다. 두테르테 전 대통령은 마르코스가 그의 선친처럼 헌법 개정을 통해 장기 집권을 노리고 있다고 주장한다. 개헌은 1억1000만 인구의  필리핀에 매우 민감한 문제다. 필리핀은 원래 4년 중임의 대통령제 였으나 마르코스 전 대통령은 계엄령과 헙법 개정을 통해 1986년까지 21년간 장기 집권했다. 대통령 임기를 6년 단임으로 제한하는 현행 헙법은 1987년 제정되었다. 2028년 대선에서 자기 집안에서 대통령을 배출하고 싶은 두테르테 전 대통령에게 마르코스의 개헌 추진은 자신의 야망에 최대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다. 

만다나노 분리독립 

두테르테 전 대통령은 지난 1월 자신의 정치적 본거지인 민다나오 최대 도시 다바오시에서 열린 개헌 반대 집회에서 마르코스 주니어 대통령을 마약 중독자라고 비난했다. 그는 또 마르코스 주니어 정부가 집권 연장을 위한 개헌을 추진한다면 민다나오 지역을 분리 독립할 것이라고 위협했다. 이에 필리핀 정부는 2월 4일 에두아르도 아노 국가안보보좌관 명의로 성명을 내고 어떤 분리 시도라도 단호한 힘으로 맞설 것이라고 천명했다. 남한 면적과 비슷한 민다나오는 필리핀에서 둘째로 큰 섬으로 ‘모로’라고 불리는 필리핀 무슬림 토착민들이 가톨릭 문화권인 필리핀 정부에서 자치·독립하겠다고 요구하면서 정부군과 무력충돌이 빈번한 지역이다. 오랜 내전으로 빈곤율과 밤죄율이 가장 높은 이 지역에서 두테르테는 검사로 활동하며 초강력 범죄와의 전쟁으로 명성을 높이다가 1988년 다바오 시장에 당선됐다. 
  
지난 1월 집회에서 현 다바오 시장인 두테르테 대통령의 차남 세바스찬 ‘바스테’ 두테르테는 마르코스 대통령에 대해 “일에 집중한다기보다는 정치와 자기 보호를 최우선으로 하고 있다”며 “국가에 대한 애정과 열망이 없다면 사임하라”고 촉구했다. 마르코스 주니어 대통령은 자신에 대한 두테르테 가문의 맹공격에 대해 무대응에 가까운 수세적 반응으로 일관하고 있다. 자신을 마약 중독자라고 비판한 두테르테 전 대통령에 대해 해당 발언이 두테르테 대통령이 수년 전 마신 “페나닐 부작용 때문”이라며 “의사들이 그를 잘 돌봐주길 바란다”고 맞받아친 것 외에는 전직 대통령과 정면 대결하는 것은 피하고 있다. 국내외 언론들은 마르코스의 이러한  미온적 대응에 대해 그가 성격이 너무 유해서 그렇다고 분석하다가도 아마도 지난 대선 때 두테르테 가문에 진 ‘빚’ 때문일 것이라는 추측을 내놓기도 한다. 두테르테 전 대통령은 지난 2월 25일 세부시에서 열린 집회에서 자신이 개헌을 무조건 반대하는 입장은 아니라고 해명했다. 그는 새 헌법이 현 대통령의 재출마를 금지한다면 개헌에 찬성할 것이라는  입장을 내놓기도 했다. 

루손 회랑 

마르코스 대통령은 미국·일본과 3국 협의를 통해 안보와 경제 지원을 얻어냈다. 사실 3국  정상회담 결과를 두고 바이든 대통령과 기시다 총리가 안보적 측면에서 협력 강화를 강조하고 있는 반면 마르코스는 국내에서 이번 회담의 경제적인 성과를 홍보하고 있다.  필리핀에 대한 수십억 달러의 투자 유치를 기대하게 만드는 이른바 ‘루손 회랑’은 필리핀 주요 지역을 연결해 철도와 항만 현대화, 에너지·반도체 공급망 구축을 통해 중국이 동남아에서 공들여온 ‘일대일로’ 구상에 맞불을 놓는 성격이다. 마르코스가 현재 중국을 지나치게 자극하지 않기 위해 안보 협력 대신 경제 협력을 강조하고 있다는 분석도 있지만, 실제로 마르코스 정부는 태국,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등과 비행기로 3시간 이내로 연결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필리핀을 아세안의 제조업과 물류 허브로 탈바꿈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특히 미국 반도체 기업들이 공급망을 전쟁 위협이 있는 대만이나 중국에서 다른 지역으로 다변화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가운데 필리핀이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특히 필리핀은 배터리 제조에 필수인 니켈을 2023년 기준 전 세계에서 둘째로  많은 매장량을 가지고 있다. 마르코스의 친미 행보 배경엔 경제가 자리 잡고 있다는 분석이 설득력을 갖는다. 

향후 두 가문의 대립과 갈등이 어떻게 전개될지 모르지만 마르코스 주니어 대통령은 두테르테 전 대통령 딸이자 현 정부의 부통령 겸 교육부 장관인 사라 두테르테 부통령과 한 배를 타고 있는 처지다. 더욱이 사라 두테르테는 현재 차기 대권 주자로 언급되는 인물 중에서 가장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마르코스 대통령으로서는 필리핀 정가의 ‘떠오르는 별’ 사라 두테르테를 적당히 견제할 필요는 있겠지만 그녀와 관계 복원이 불가능한 엄청난 균열이 생기는 것도 두려워할 것이다. 최악에는 마르코스 주니어가 36년 전 축출된 아버지의 비극적 운명을 이어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두테르테 전 대통령은 22년간 다바오 시장직을 7차례 연임하면서 사병부대인 다바오 척살대(Davao Death Squad)를 동원해 무법 천지였던 도시를 범죄 없는 상업도시로 탈바꿈시켜 놓았다. 2016년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에도 마약사범 수천 명이 경찰에 사살되고 무고한 시민들까지 불법 체포되어 희생되자 국제 인권단체들이 심각한 우려를 표하기도 했다. 두테르테는 대통령에 당선된 후 국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방부 처리되어 필리핀 북부 고향에 안치돼 있던 마르코스 전 대통령 시신을 국립묘지에 안장시켜 주기도 했다. 사실상 독재자 마르코스 전 대통령의 복권을 승인한 것이며 독재자 가문 간 정치적 동맹이 이때부터 본격 시동을 걸었다고 볼 수 있다. 마르코스 주니어는 지난 선거에서 페이스북과  유튜브 등 소셜미디어를 적극 활용해 젊은 유권자를 집중 공략함으로써 선친의 집권 시절 어두웠던 필리핀 역사를 교묘하게 지우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두테르테 가문의 주장처럼 마르코스 주니어가 차기 대권이 두테르테 가문에 넘어가는 것을 막고 자신의 집권 연장을 위한 개헌을 추진하고 있다면 양측 간 정면 충돌은 불가피해지고 필리핀 정세는 급격히 불안해질 수 있다. 특히 남중국해 영유권 문제를 놓고 중국과 충돌이 격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두 가문 간 충돌은 필리핀 경제와 안보에도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 마크코스 주니어 대통령이 국내외 수많은 난제를 어떻게 풀어나갈지 세계는 주시하고 있다. 특히 미·중 간 전략적 경쟁 사이에서 장기적으로 국익에 부합하는 외교와 안보 전략을 수립해야 하는 우리나라는 그의 행보에 관심이 더 클 수밖에 없다.   

 이수완 필자 주요 이력 

▷코리아타임스 기자 ▷로이터통신 선임특파원 ▷로이터통신 편집장 ▷서울외신기자클럽 회장 ▷아주경제 글로벌본부장 ▷아주경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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