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포스트] 사람의 거주 조건에 대중교통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최근 아파트 단지들도 역세권을 강조하기 위해 지하철이나 기차의 정차역 이름을 넣는 사례가 빈번해지고 있다.
조선시대에도 공공교통 체계인 역과 원을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되고 역원명이 마을이름을 넘어 지명으로까지 굳어진 사례가 많다. 서울 서초구 양재동, 서울 용산구 청파동, 서울 노원구, 서울 서대문구 홍제동,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 등이 대표적이다.
6일 한국부동산원의 청약홈에 따르면 2023년 5월부터 2024년 4월까지 분양이 진행된 아파트 단지 332곳 가운데 39곳이 아파트 단지 이름에 ‘OO역’을 붙인 것으로 나타났다.
건설사가 아파트 단지명에 OO역을 넣는 것은 대중교통 정차역과 매우 가깝다는 입지 조건을 강조하고 이를 홍보하기 위한 것이다. 역세권 선호 현상이 아파트 단지명에도 영향을 끼친다는 방증이다.
심지어 역세권을 강조하기 위한 홍보 방식의 유행으로 정차역과 떨어진 거리가 1㎞를 넘는 아파트들도 단지명에 정차역 이름을 넣는 사례가 발생한다.
정책에서 사용되는 역세권 개념은 대략 1㎞ 정도다. 민간임대주택에 관한 특별법 제2조에 따르면 역세권을 철도역, 환승시설 등의 시설부터 1㎞ 거리 이내의 지역으로 정하되 지방자치단체의 장이 50%(500m) 범위에서 늘리고 줄일 수 있도록 해놨다. 다만 민간 분양 아파트의 역세권 범위를 규정하는 법적 기준은 없다.
지난해 11월 준공된 경기 시흥시 효성해링턴플레이스목감역 아파트 단지는 2024년 개통이 예정된 목감역과 도보 기준으로 1.3㎞ 떨어져 있다. 경기 평택시 지제역반도체벨리제일풍경채 2블록 아파트 단지와 1호선 평택지제역 사이의 거리는 자그마치 2.8㎞다.
행정구역이 달라도 역과 가까우면 단지명에 해당 역의 이름을 넣기도 한다. 행정구역상으로 경기 부천시 괴안동에 위치한 e편한세상온수역 아파트 단지는 700m 떨어진 부천시 1호선 역곡역이 아니라 240m 떨어진 서울 구로구 온수역의 이름을 단지명에 넣었다.
조선시대에는 철도는 없었지만 공공교통 체계인 역원 제도가 존재했으며 이러한 역원들은 현재까지도 지역명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역원 제도는 역과 원을 합쳐서 부르는 말이다. 중앙 관청의 공문을 지방관청에 전달하고 관리들에게 타고 다닐 말을 제공하며 외국 사신의 왕래, 변방 군정 보고 등을 맡아 하던 곳을 역이라고 하며, 숙식 편의를 제공하는 공공여관을 원이라고 한다.
주요 도로에 핵심 위치에 설치된 역원은 인간과 물자가 통하는 국가의 혈관 역할을 한 데다가 시스템을 제대로 유지하기 위해선 인력이 필요했기 때문에 이를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되는 사례가 많았다.
역을 중심으로 형성된 대표적인 취락 가운데 유명한 것은 경기도 과천군 동면(현재의 서울 서초구 일대)의 양재역이었다. 지금도 서울 서초구 양재동이라는 지명에 흔적이 남아있는 양재역은 서울 가까이에 있는 주요 역 가운데 하나였다.
양재역은 예로부터 말죽거리라는 애칭으로 불리기도 했는데 말죽거리라는 명칭 또한 말에서 죽을 끓여 먹이던 곳이라는 뜻에서 유래했다는 가설이 존재한다.
양재역이 사람과 물자가 모이는 허브 역할을 했다는 사례를 증명하는 사건이 하나 있으니 조선 명종 시기 발생한 ‘양재역 벽서 사건’이다. 벽서는 개인 사이의 사소한 고발부터 당파나 나라를 비판하기 위해 공공장소에 몰래 붙이는 게시물로 사람이 자주 다니는 장소에 붙여 효과를 극대화하는 일이 많았다.
조선왕조실록 명종 2년(1547년) 9월18일의 기록을 살펴보면 당시 정3품 부제학을 지내던 정언각은 “신의 딸이 남편을 따라 전라도로 시집을 가는데 부모 자식 사이의 정리에 따라 멀리 전송하고자 한강을 건너 양재역까지 갔습니다. 그런데 벽에 붉은 글씨가 있기에 보았더니 국가에 관계된 중대한 내용으로서 지극히 놀라운 것이었습니다”라고 말하며 글 하나를 보고 한다.
정언각이 보고한 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여자 군주가 위에서 정권을 잡고 이기 같은 간신들이 아래에서 권세를 농간하고 있으니, 나라가 장차 망할 것을 서서 기다릴 수 있게 되었다. 어찌 한심하지 않은가.”
그 뒤 이기, 윤인경 등이 벽서를 빌미로 삼아 중종의 아들인 봉성군 이완을 처형하고 이언적, 노수신 등 반대 세력을 유배 보내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이를 정미사화 또는 양재역 벽서 사건이라고 한다.
서울 노원구와 서울 용산구 청파동의 이름 유래가 된 노원역과 청파역 또한 병조에서 직접 관리할 정도로 중요한 역으로 꼽혔다. 노원역과 청파역은 조선 초기에는 경기도 양주도호부에 소속됐으나 이후 한성부로 소속을 옮기기도 했다.
조선시대 노원역의 가장 중요한 업무는 역마를 관리하는 일이었다.
광해군일기 1623년 2월14일 기록에 따르면 노원역의 역리는 병조에 “평상시에는 대립마(待立馬) 100호, 급주마(急走馬) 42호를 배치해 영서역’양재역에서 제때 교체시켰는데 난리 이후 각 역의 마호(馬戶)들이 거의 모두 사망했다”고 보고했는데 이는 노원역이 평상시 역마 관리를 맡았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노원역은 조선 초기 태조와 태종이 잠시 머무르기도 했는데 태조는 1394년 한양을 도읍으로 결정한 뒤 종묘가 들어설 위치를 살펴본 뒤 노원역에서 숙박했고 태종은 1405년 태상왕 이성계를 따라가 노원역에서 잠을 자기도 했다.
청파역은 지금의 서울 용산구 청파동 일대에 설치된 역으로 근처에 푸른 야산 언덕이 많았기에 청파(靑坡’푸른 언덕)라는 이름이 붙었다. 조선 초기 일본으로 가는 조선통신사가 긴 여정을 떠나기에 앞서 말을 탔던 곳이다.
조선 후기에 들어선 뒤로는 현재 동작구 사당동 일대인 남묘(남관왕묘)에서 이태원을 거쳐 곧장 서빙고로 건너가는 지름길이 사용된 것으로 보이지만 조선시대 때부터 ‘청파역리’라는 큰 마을이 형성될 정도로 사람과 물자가 오갔으며 한성과 삼남 지방을 잇는 도성 밖 첫 번째 역이었기 때문에 계속 중요시됐다.
서울 서대문구 홍제동과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은 역이 아닌 원의 이름이 붙은 대표적 지역이다.
홍제원은 무악재를 넘으면 바로 동쪽에 위치한 공공여관으로 한양과 의주를 잇는 의주로에 위치한 원 가운데 한양과 가장 가깝다. 이에 중국 사신이 많이 이용했으며 중국 사신을 위한 공관을 따로 마련해 중국 사신들이 공관에서 조선 임금을 만나기에 앞서 마지막 준비를 하기도 했다.
홍제원이 조선 역사의 중심으로 떠오른 적이 있으니 바로 인조반정 때의 일이다. 1623년 3월13일 김류, 이귀, 최명길 등 서인을 중심으로 한 반정 세력은 군을 홍제원에서 집결시킨 뒤 그대로 서울로 밀고 들어갔다. 인조는 친위부대를 이끌고 연서역(지금의 은평구 역촌동)에서 반정군과 합류했다.
이태원은 중국 사신이 머물던 홍제원과 달리 일본국, 류큐국(현재의 일본 오키나와현 일대에 존재했던 왕국)에서 방문한 사신들이 거친 곳이다. 이태원의 역할이 매우 막대했기 때문에 폭군으로 유명한 연산군조차 이태원을 함부로 출입 금지구역으로 설정하지 못했을 정도였다.
연산군 10년(1504년) 10월10일 기록을 살펴보면 연산군은 “녹양역(지금의 경기 의정부시 녹양동)부터 왕심리(지금의 서울 성동구 왕십리) 근처까지 모두 금표안에 넣고 다만 남대문 밖 이태원 길만 통하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다만 실제 조선시대 이태원의 위치는 지금의 용산동2가인 용산고등학교 부근으로 지금의 이태원동과는 해방촌을 사이에 두고 1.5㎞ 정도 떨어져 있다. 김홍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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