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올해 통화정책의 전면 재검토를 시사했다. 미국의 기준금리 인하 시점이 지연되고 있는 가운데 우리나라 1분기 경제성장률이 예상 밖 호조를 나타낸 게 직접적인 원인이 됐다.
강한 내수 회복세가 확인된 만큼 경기 침체에 대응하기 위해 금리를 내려야 한다는 논리가 궁색해진 상황이다. 오는 23일 열릴 금융통화위원회(금통위)를 앞두고 다양한 변수가 얽힌 고차 방정식을 풀어 내기 위한 한은 내 토론이 더 격렬해질 전망이다.
2일(현지시간) 제57차 아시아 개발은행(ADB) 연차총회 참석 차 조지아 트빌리시를 방문 중인 이 총재는 기자 간담회를 통해 “지금 상황에서는 기준금리 인하 시점을 얘기하기 어려워졌다”며 “4월 통화정책방향(통방)이 5월 통방의 근거가 되기 어려운 상황인 만큼 기존 논의를 재점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금통위는 앞서 “통화정책 기조를 충분히 장기간 지속한다”는 기존 입장에서 지난달 12일 ‘장기간’이라는 표현을 삭제하며 연내 금리 인하에 대한 가능성을 높였다. 하지만 이후 여러 변수가 추가로 발생하며 금리 인하의 조건으로 내건 전제들이 변화한 상황이다.
이 총재는 △미국 연방준비제도(연준·Fed) 기준금리 인하 시점 지연 △예상보다 높은 1분기 국내총생산(GDP) 성장률 △중동 사태 악화에 따른 유가·환율 변동성 등을 지목하며 “바뀐 변수들이 우리 통화정책에 어떤 영향을 줄지 신임 금융통화위원 2명을 포함한 금통위원들과 논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총재가 지목한 세 가지 요인은 한은의 금리 인하 시점 지연을 가리키고 있다. 그는 “4월 통방 때만 해도 미국이 피벗(통화정책 전환) 시그널을 줬기에 하반기에는 (미국이) 금리 인하를 시작할 것이란 전제로 통화정책을 수립했다”고 설명했다. 다만 지난 2일 미국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결과와 관련해 “미국의 견조한 경기와 물가 수준으로 금리 인하 시점이 뒤로 밀리기 시작했다”고 덧붙였다.
중동 전쟁이 촉발한 환율 급등에 대해 그는 “유가 급등에 이어 미국의 (견조한 성장 관련) 데이터가 겹치면서 환율 변동성이 급격히 커졌다”고 했다. 환율 불안까지 겹친 우리나라는 미국과 금리 격차 확대를 감수하면서까지 먼저 금리를 내리기 어려운 처지다.
특히 1분기 GDP 성장률이 예상보다 높게 나오면서 고민이 더 깊어졌다. 당장 5월 수정 경제 전망에서 연간 성장률 전망치를 기존 2.1%보다 상향 조정할 게 유력하다. 이 총재는 “1분기 1.3% 성장률은 직관적으로 보면 지난해 성장(1.4%)을 1분기에 다 했다고 볼 수 있다”며 “기계적으로 보면 GDP 성장률 상향 조정이 불가피한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이에 따라 물가 전망치도 원점에서 재검토해야 된다고 밝혔다. 4월 소비자물가지수 상승률이 2.9%로 석 달 만에 2%대로 내려온 것과 관련해 이 총재는 “지금 상태에서 기존 예상에 부합했느냐는 의미가 없어졌다”고 했다. 그는 “하반기 성장률 전망 수치가 바뀔 것이기 때문에 물가 전망도 다시 봐야 하는 상황이라 불확실성이 크다”고 덧붙였다.
이 총재는 향후 내수 회복의 지속 가능성에 대한 물음표를 걷어내는 걸 우선 과제로 꼽았다. 그는 “경제 지표가 굉장히 좋게 나왔는데 한은 입장에서 뭘 놓쳤는지, 영향이 일시적인지 더 길게 갈 것인지 등을 점검할 시간”이라고 짚었다. 이어 “예상보다 크게 차이가 났기 때문에 어디서 차이가 발생했는지 (관련 부서에서) 검토 중”이라며 “(이달 금통위까지) 3주간 어려운 논의가 있을 것 같은데 겸허한 마음으로 살펴야 할 것”이라고 전했다.
한편 이 총재는 오는 5일까지 ADB 연차총회에 참석한다. 역내 주요국 재무장관·중앙은행 총재, ADB 및 글로벌 투자은행 인사들과 폭넓게 접촉하며 아태 지역을 포함한 글로벌 경제 상황과 정책 과제 등에 대해 의견을 교환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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