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고금리가 장기화할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세계 각국 중앙은행의 셈법이 복잡해졌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조기 금리 인하를 기대하며 피벗(통화정책 전환)을 준비 중이던 중앙은행들은 새판을 짜야 할 처지다.
유럽중앙은행(ECB)은 “우린 미국과 다르다”며 연준에 대해 차별화(divergence)를 예고했지만 “너무 멀리 갔다가는 위험하다”며 자제를 촉구하는 목소리가 벌써부터 나오고 있다. 미국을 따라 고금리를 유지하자니 경제성장이 우려되고, 각자도생을 내세우며 금리를 낮추자니 통화가치 하락이 발목을 잡는 양상이다. 비둘기 기조를 고수 중인 일본은행(BOJ)은 연일 엔화값 방어에 화력을 집중하고 있고, 미국을 따라 매파를 유지 중인 뉴질랜드는 실업률 상승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연준은 1일(현지시간) 열린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정례회의를 통해 기준금리를 5.25~5.5%로 동결하면서 고금리 장기화를 시사했다. 연준이 이날 공개한 성명문에는 ‘인플레이션 2% 목표 달성을 위한 추가적인 진전이 부족했다’는 문구가 처음으로 추가됐다. 사실상 이른 시일 내에 금리 인하로 선회할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인정한 셈이다.
연준은 당분간 물가 흐름을 관망하는 태도를 유지할 것으로 보인다. 제롬 파월 연준 의장은 이날 “(금리)인상 가능성은 낮다”면서도 3월 FOMC 회의에서 자신했던 연내 금리 인하에 대해서는 함구했다. 오히려 그는 “인플레이션을 낮추기 위해 지속 가능한 경로로 가고 있다는 확신을 얻는 데 시간이 더 걸릴 것”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주목할 점은 연준이 고금리 장기화를 시사했는데도 불구하고 캐나다 중앙은행이 “연준보다 먼저 금리를 인하할 수도 있다”면서 제 갈 길을 가겠다고 선언한 점이다. 티프 매클렘 캐나다 중앙은행 총재는 이날 의회에 출석해 “우리는 연준이 하는 것을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며 “우리는 우리만의 통화정책을 운용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인플레이션의 지속적인 하락세에 힘입어 캐나다가 조만간 통화정책을 완화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캐나다의 다음 금리 결정일은 6월 5일이다. 사실상 6월 금리 인하를 예고한 것이다.
유럽중앙은행(ECB)과 영란은행(BoE) 역시 조기 금리 인하를 고수 중이다. 크리스틴 라가르드 ECB 총재는 최근 “우리가 길들이려는 동물은 다른 종류”라며 유럽은 에너지 비용이, 미국은 막대한 재정적자가 인플레이션의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인플레이션 성격 자체가 달라 연준과 엇박자를 내는 것이 문제되지 않는다는 설명이다. 유로존 물가는 2%대에 안착하는 상황이다. 4월 소비자물가지수(CPI) 상승률은 전년 동월 대비 2.4%로 전달과 동일했고, 변동성이 큰 에너지와 식료품 물가 등을 제외한 근원 CPI 상승률은 3월 2.9%에서 4월 2.7%로 둔화됐다. 4%대에 머물던 서비스 물가 상승률은 3.7%로 내려갔다.
앤드루 베일리 영란은행 총재 역시 “유럽과 미국은 다르다”며 여름께 금리 인하로 전환할 수 있음을 시사했다.
그러나 미국과의 통화정책 엇박자가 환율에 상당한 부담으로 돌아온다는 점은 일본이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이날 뉴욕 외환시장에서 엔 환율은 장중 달러당 157.55엔에서 153엔까지 급락(엔화 가치 상승)하며 일본 당국이 지난달 29일을 포함해 이번 주에만 두 번이나 외환시장에 개입하는 모습을 보였다. 월가는 일본이 지난달 29일 환시 개입에만 약 350억 달러(약 48조원)를 쏟아부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일본 당국 개입으로 160엔까지 뚫렸던 엔화값 추락은 다소 진정됐지만 여전히 엔화가치는 달러당 155엔 선을 웃돌고 있다.
외환 전문 금융업체 콘베라의 선임 외환 딜러인 제임스 나이베톤은 “시장은 일본 당국 개입 시 달러·엔 환율 하락을 추세 반전의 신호보다는 (달러) 저가 매수 기회로 보고 있다”며 “일본은행은 상당한 화력을 보유하고 있지만 현재는 흐름을 거스르고 있다”고 짚었다.
ECB 내에서도 연준과의 금리 격차를 두고 논쟁이 일고 있다. 프랑수아 빌레로이 드 갈라우 프랑스 중앙은행 총재는 6월 이후에도 금리를 계속 낮춰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로버트 홀츠먼 오스트리아 중앙은행 총재는 “우리가 연준과 너무 멀어지면 매우 힘들어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반면 연준을 따라 고금리를 고수하는 나라들은 경제성장 둔화에 직면했다. 뉴질랜드의 올해 1분기 실업률은 4.3%로 전 분기(4.0%)보다 크게 높아졌다. 전년 동기(3.4%) 대비로는 0.9%포인트나 높아졌다. 뉴질랜드중앙은행은 내년 중 첫 금리 인하에 나서겠다고 예고했지만 실업률 급증으로 인해 정책이 수정될 수 있다.
제임스 나이틀리 ING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연준의 인플레이션 문제는 글로벌 차원의 문제로, 다른 중앙은행들은 이를 무시할 수 없다”며 “특히 연준이 금리를 빨리 낮추지 않는다면 달러 강세를 부추겨서 유럽 경제에 스트레스를 야기하고, 다른 중앙은행의 금리 인하 능력을 제한할 수 있다”고 파이낸셜타임스(FT)에 말했다. 이어 “미국 인플레이션에서 일어나고 있는 문제가 유럽에서도 표면화할 수 있다는 우려가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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