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만드는 사람들은 출판업계를 ‘홍대 바닥’이라고도 말합니다. 이곳에 많은 출판사가 모여 있기 때문입니다. 문화 예술의 거리로 불리우던 홍대의 옛 정취도 지금은 많이 사라졌지만, 여전히 의미 있는 책의 가치를 전하고 싶습니다. 홍대 바닥에서 활동 중인 다섯 명의 출판인이 돌아가며 매주 한 권씩 책을 소개합니다. <편집자주>
[번역가 조민영] 해문출판사에서 나온 애거사 크리스티 전집. 누가 먼저였는지 모르지만, 어릴 적 우리 세 자매는 빨간 책등에 흰 명조체로 제목이 적힌 이 전집을 의기투합하여 한 권씩 사 모았다. 막내는 책을 아주 꼼꼼히 읽으며 작가가 심어놓은 단서를 따라 제법 자주 범인을 맞혔다.
나도 이번에는 꼭 찾아내리라 다짐하며 책을 펼쳤지만 살인이 두어 건쯤 발생하고 전개에 속도가 붙으면, 그때부터는 추리고 뭐고 없다. 그저 사건의 전모가 드러나는 결말을 향해 달려갈 뿐.
어쩌면 나는 이야기 자체보다, 범인이 밝혀질 때마다 느꼈던 안도감에 취해 있었는지 모른다. 고전 추리소설의 경우 극악무도한 범죄자가 활개 치는 불안한 세계에서 천재 탐정이 반드시 사건을 해결한다. 잠재적이나마 악이 소탕되고 세계는 안전해진다.
사이코패스나 연쇄 살인마 같은 절대악이 등장하면서는 소설 속 악인도 진화했다. 이들의 범죄 행위와 정신세계는 내 상식으로는 설명할 수 없었다. 반면 한나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은 선과 악의 모호한 경계를 드러냈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람이 잔혹한 범죄를 저지르고, 때로는 권력과 부를 이용해 법망을 유유히 빠져나가기도 한다. 이제 추리소설은 안도감을 주는 게 아니라 인간 본성이, 악의 근원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추리소설을 재미 위주의 오락소설로만 읽을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철학자이자 추리소설가 백휴는 이렇듯 사회 현상을 다르게 보는 시각의 필요성을 절감하며 〈추리소설로 철학하기〉를 썼다. 작가는 범죄를 다루는 추리소설이 기존 사유를 전복하거나 보완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사실 추리소설은 오랫동안 통속문학이라는 프레임에 갇혀 사유와 비평이 허락되지 않았다. 백휴는 한 작가의 개별 작품이 오락으로 소비되더라도, 전체 작품을 반복해서 읽는다면 그 작가의 작품세계를 관통하는 주제를 찾을 수 있다고 본다. 순수문학과 마찬가지로 추리소설을 비평하기도 가능하다는 얘기다.
〈추리소설로 철학하기〉에서는 <공포의 권력>, <검은 태양>, <미친 진실>를 쓴 줄리아 크리스테바를 소개한다. 그는 말 그대로 ‘추리소설로 철학하기’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작가다. 원래 철학자인 그는 사유와 추리소설이 둘 다 ‘위반’의 문제와 관련된다고 본다. 위반은 금기가 있기 때문에 생겨난다. 크리스테바는 금기를 깨뜨리는 자유, 즉 삶에서 일탈을 경험할 때 ‘나는 어디에 있는가’라는 철학적 질문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또한 이 책에서 폴 오스터의 〈뉴욕 삼부작〉 분석은 가장 흥미롭게 읽은 부분이다. ‘작가’ 폴 오스터는 소설 속 ‘탐정’ 폴 오스터가 된다. 이야기 생산자인 작가와 작가가 창조한 인물이 동등한 위상을 갖는 셈이다. 작가의 초월적 지위를 해체하는 이 작업은 권위가 해체되는 시기에 태어난 추리소설 장르의 성격을 잘 구현한다.
그런 점에서 백휴는 추리소설 애독자라면 〈뉴욕 삼부작〉만은 꼭 읽으라며 이렇게 말한다.
“이 작품은 강변에서 풍경을 감상하는 정도가 아니라 높은 산꼭대기에서 각각의 샘들이 발원해 지류를 이루고 한 줄기 큰 강으로 합류했다가 바다에 이르는, 추리소설의 정신을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감동적인 뷰를 제공한다.”(150쪽)
백휴는 〈추리소설로 철학하기〉에서 류성희, 서미애, 황세연, 정유정 등 국내 추리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도 다룬다. 독서 폭이 좁은 나에게는 이들이 다소 낯설고, 분석 틀로 활용한 한나 아렌트, 슬라보예 지젝, 조르조 아감벤의 이론도 따라가기 녹록지 않다. 그럼에도 이미 읽었던 작품이 철학하기를 통해 전혀 다르게 읽히는 경험이 경이로웠다.
작가는 마지막 장에서 ‘추리소설이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 이 책을 읽기 전이었다면 아마 나는 초등학생 수준의 이런 답변을 내놓았을 것이다. 살인 사건이 벌어지고 회색 뇌세포가 남들보다 백배쯤 많은 천재 탐정이 범인을 찾는 이야기.
솔직히 지금도 명쾌하게 답하지는 못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말할 수 있다. 추리소설을 철학의 방식으로 이해했을 때 가장 깊이 있고 새로운 사유가 가능하다고.
|번역가 조민영. 세 아이가 잠든 밤 홀로 고요히 일하는 시간을 즐긴다. 월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번역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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