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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 직원인 A씨는 최근 H 자동차의 신차를 구매했다. 차값은 4000만 원 정도로 1000만 원의 선수금을 걸고 나머지는 금융사가 제공하는 할부금융 상품을 이용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A씨를 담당한 딜러가 신용카드사의 장기 자동차 카드 할부 상품을 권했다. 계속되는 권유에 결국 A씨는 복잡한 카드 발급 절차와 특별한도 부여 등의 과정을 거쳐 신용카드 장기할부로 차를 구매하게 됐다. 그는 “카드사에도 할부금융 상품이 있는데 굳이 카드사 장기 할부 서비스를 권하는 이유를 이해하기 어려웠다”며 “지금 당장 대출 받을 일은 없지만 DSR 규제도 적용받지 않는데다 금리도 약간싸고 현금도 돌려주기(페이백)에 카드 할부 서비스를 선택하게 됐다”고 말했다.
지난해 국산 신차를 구매할 때 신용카드 할부 서비스로 결제한 규모가 전년 대비 2조 원 급증해 40조 원을 돌파했다. 가격이 수천만 원에 달하는 자동차지만 신용카드 할부 서비스를 이용할 경우 자동차담보대출(오토론)이나 할부금융과 달리 매달 결제하는 돈은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의 적용을 받지 않는다. 가계대출 관리의 ‘사각지대’가 1년 새 훌쩍 커버린 셈이다. 이에 금융 당국은 신차 구입 시 고객의 카드 사용 한도를 일시적으로 늘려주는 ‘특별 한도’가 적정하게 운영되고 있는지 살펴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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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일 금융업계에 따르면 최근 금융감독원은 지난해 국내 신용카드사들의 자동차 할부금융 잔액이 전년(10조 6909억 원)보다 1조 원 이상 줄어든 9조 6386억 원이라고 밝혔다. 자동차 할부금융 잔액이 전년대비 감소한 것은 2013년 이후 10년 만의 일이었다. 업계에서는 자동차 금융은 성장 정체에 빠진 신용카드사들이 적극적인 영업 경쟁을 펼치던 분야임을 고려하면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결과라는 반응이 나왔다. 하지만 잔액이 10년 만에 감소세로 돌아선 이유는 곧 드러났다. 카드 장기 할부 서비스를 통해 신차를 구입하는 경우가 급증했기 때문이다. 여신금융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국산 신차 카드 결제금액은 40조 3000억 원으로 전년(38조 4000억 원)보다 2조 원 이상 늘었다. 카드사들이 대출의 일종인 할부 금융보다는 신용카드 장기 할부 서비스로 소비자의 선택을 유도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카드사들의 장기 할부 서비스가 늘어난 원인은 결국 소비자들이 선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신업계에서는 카드사들이 할부금융보다 장기 할부 서비스를 늘리는 것이 유리해 할부 서비스에 영업력을 쏟으면서 소비자들의 선택을 유도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실제로 할부금융이나 오토론으로 차를 구매할 때 금융사들은 소비자로부터 이자를 받을 뿐이지만 할부 서비스로 차를 사게 되면 ‘이자’인 할부 수수료에 가맹점으로부터 받는 가맹점 수수료가 발생한다. 업계에서는 이 가맹점 수수료가 차 가격의 1.9%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 지난해 국산 신차 카드 결제액이 40조 3000억 원임을 감안하면 8000억 원에 달하는 가맹점 수수료를 추가로 번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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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업계에서도 소비자 입장에서는 장기 할부 서비스가 더 유리할 수 있다는 점은 동의를 하고 있다. 우선 금리가 일반 캐피털사들이 제공하는 것보다 카드사의 할부 수수료율이 조금 더 저렴하다. H카드의 경우 장기 할부 서비스 금리를 5.0~5.4%로 홍보하고 있는데 캐피털사 중 가장 저렴한 금리를 제공하는 H캐피탈이 경우 지난달 실행한 할부금융 상품의 평균 금리는 5.6%였다. 여기에 카드 할부로 결제할 경우 신용카드사들이 차 가격의 1% 정도를 현금으로 돌려주는 것도 소비자들에게는 매력적이다. 카드사 한 관계자는 “결국 소비자들이 카드 할부 서비스가 더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문제는 고객이 신차를 구매할 때 카드사들이 일시적으로 카드 결제 한도를 늘려주는 ‘특별한도’에 있다. 특별한도는 병원비나 경조사 등 우리 삶에 불가피한 항목에서 일시적으로 지출이 늘어났을 때를 대비해 도입된 것인데 고객 스스로 결정하는 자동차 구매에 이 같은 특별한도를 적용하는 것이 제도 취지에 맞냐는 지적이 나온다. 특별한도는 법에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신용카드 발급 및 이용한도 부여에 관한 모범규준’에 의해 예외적으로 인정된 제도다. 하지만 해당 모범규준에도 ‘과도한 특별한도 책정으로 신용카드가 남용되지 않아야 한다’는 단서조항이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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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특별한도를 받아 자동차를 할부 서비스로 구매하면 매달 원리금을 내야 한다는 점은 오토론 등의 대출 상품과 다를 것이 없음에도 DSR 규제를 받지 않는다는 점은 더 큰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예를 들어 이미 주택담보대출(30년 만기·연 4.5% 금리 적용) 3억 원을 받고 있는 연봉 6000만 원인 차주가 자동차를 사기 위해 오토론을 신청할 경우 2540만 원(대출 기간 5년)까지만 가능하다. 만약 5000만 원짜리 자동차를 사려면 자신의 돈 2460만 원이 필요하다. 하지만 할부 서비스는 DSR에 적용되지 않기에 5000만 원 전체를 할부로 결제할 수 있다. 아울러 차를 산 후에도 2540만 원의 대출 여력을 그대로 유지하게 된다.
이 때문에 최근 금융감독원은 신용카드사들의 특별한도가 적정하게 부여되고 있는 지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특별한도를 받아 진행한 자동차 장기 할부 서비스가 차주에게는 대출과 똑같이 부담이 되지만 DSR에 포함되지 않는 것은 불합리하다는 지적을 의식한 때문이다. 금감원 관계자는 “DSR에 포함하겠다는 등의 의도로 살펴보는 것은 아니고 (지적이 있어) 한도 적정성을 보고 있다”며 “아직은 DSR 회피 목적이 많지는 않은 듯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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