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 중장기 투자금 적은 탓…정부 개입에도 환율 ‘고공행진’
원화, 외부 충격에 유독 취약…“달러 유입 채널 확대 필요”
한국을 떠날 생각은 없다. 이유는 두 가지다. 지금 미국 금리가 높을 때 미 국채를 싼값에 살 수 있겠지만, 투자자들은 나중에 미국 금리가 떨어질 때 달러 가치도 같이 떨어진다는 점을 알고 있다. 둘째, 한국은 미국보다 금리는 낮지만, 물가상승률을 고려하면, 실질 금리가 나쁘지 않아서 여전히 매력적인 투자처이다.(외국계 운용사 A씨)
채권 시장과 주식시장에서 한국을 떠나는 자금은 많지 않다. 올해 1분기 중 외국인 주식투자는 총 15조8000억 원이다. 통계가 집계된 1998년 이후 역대 최고 수준이다. 상장채권 보유 규모도 244조3000억 원이나 된다. 4월 들어서도 코스피시장에서 2조9000억 원어치 사들였다.
그런데도 환율이 뛰고 있다. 이달 16일엔 원·달러 환율이 장중 1400원을 돌파했다. 역대 원·달러 환율이 1400원을 기록한 것은 이번을 포함해 1998년 국제금융위기(IMF),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2022년 미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긴축까지 단 4차례에 불과하다. 중동의 지정학적 위기와 미국의 고금리 장기화 가능성에 대한 우려 속에 외국인 주주 배당 송금까지 겹쳤지만, 이례적이라는 평가다.
시장 전문가들은 대외 환경도 문제지만, 취약한 ‘달러조달 환경’을 한 원인으로 꼽는다. 세계채권지수(WGBI) 편입 등을 통해 ‘달러화 자금 조달원’을 다양화해야 한다는 얘기다. 편입의 선행 조건으로는 제도개선을 통한 외국인의 시장 접근성이 꼽힌다.
유독 흔들리는 원화 왜?
최상목 경제부총리는 최근 미 워싱턴 D.C.에서 스즈키 슌이치 일본 재무장관과 만나 양국 통화 가치 하락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공유했다. 두 재무장관은 “급격한 외환 시장 변동성에 대응한 적절한 조치를 취할 수 있다”라며 양국이 처음으로 공동 환율 구두 개입에 나섰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도 이날 미국 CNBC 방송 인터뷰에서 “환율 움직임이 과도해 변동성이 지속되면 대응하겠다”라고 했다
잇따른 시장 개입과 한국은행의 긴축통화정책 유지에도 불구하고 원·달러 환율이 급등락하는 것은 미국의 고금리 장기화(금리 인상) 전망이 힘을 얻으며 달러 강세가 더 심화할 우려가 있어서다. 16일(현지시각) 유로·엔화 등 주요 6개국 통화 대비 달러 가치를 나타내는 달러 인덱스는 106.37까지 오르면서 5개월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미 연준의 긴축 통화정책 기조는 각국 중앙은행의 피벗(통화정책 전환)을 늦춰 글로벌 경제의 침체 가능성 또한 높인다. 특히 해외의존도가 높은 한국 경제는 성장의 하방 위험이 커진다. 수출이 안 되면 달러가 들어올 창구가 줄어든다.
금융시장에서는 당분간 고금리 장기화를 전망하며 달러 강세가 더 심화될 것으로 우려한다. 미국을 제외하면 경제도 좋지 않다. 유럽중앙은행(ECB)이 금리 인하 카드를 만지작 하는 이유다. 달러값이 더 뛸 수 있다는 얘기다. 문홍철 DB금융투자 연구원은 “최근 환율 급등은 미국 제외 전 세계 경기가 침체이고 조기에 통화정책을 완화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ECB 등 각국이 금리를 내리기도 쉽지 않다. ECB도 금리 인하 가능성을 열었지만, 라가르드 총재의 언급은 많이 약화했다.
WGBI 편입, 중장기 자금 유입 효과
외환시장 안정이 필요한 시기다. 어떻게 해야 할까. 최 부총리는 18일 워싱턴 D.C.의 IMF 본부 건물에서 한국 특파원들과 만난 자리에서 통화 스와프 필요성을 묻는 말에는 “통화 스와프는 유동성이 부족한 경우에 대한 대응 장치”라면서 “그런데 지금 외환 시장은 유동성 부족에 따른 게 아니라 글로벌 경제 환경에 따른 것”이라고 답했다.
정부는 유동성에 문제가 없다고 얘기한다. 그러나 이건 국내 얘기다. 글로벌 유동성과 투자자금은 미국을 향하고 있다. 장기적으로 달러 부족현상이 나타날 수도 있다.
돈을 돈(외환시장)으로 막는 ‘개입’ 방식은 한여름에 문을 열고 에어컨(냉방기)을 가동하는 것과 같다. 단적인 예가 중국이다. 2014년 중국은 4조 달러의 외환을 보유했지만 2년여 동안 외환시장 불안을 겪으면서 1조 달러를 날렸다. 미국 등의 제재를 불러올 수도 있다.
경상수지는 달러화 자금의 중요한 원천이지만, 정책 대안 가치는 많이 희석됐다. 외화자금 조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줄고 있어서다. 반도체를 제외할 경우 지난 1년간 누적된 무역수지 적자 규모는 약 319억 달러(약 44조 원) 수준이다.
자본시장연구원은 한국의 외환시장이 대외충격에 취약한 것에 대해 ‘달러화 자금 조달원’이 다양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WGBI편입 등을 통해 달러 유입 통로를 확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한국이 WGBI에 편입될 경우 80조∼90조 원가량의 외국인 투자금이 국채로 유입될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외환시장 한 관계자는 “미국, 유럽 등 주요 선진국은 외국인투자자의 국채 보유 비중이 30∼40%에 달한다. 하지만 우리 국채의 외국인 보유 비중은 10%를 밑돌고 있다”면서 “WGBI에 편입되면 외국인의 국채에 대한 안정적인 중장기 투자가 늘어나면서 국채 및 외환시장 안정에도 기여할 것”이라고 했다.
이복현 금융감독원은 “(WGBI에) 포함되면 더 많은 중장기 채권 자금이 시장에 유입돼 외환시장 안정에 기여할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반면, 외국인의 국내 채권 매입 규모가 커지면 자본 유출 위험(더 높은 금리를 좇아)도 커질 수 있다는 목소리도 있다. 2008년 금융위기가 터진 뒤 외국인들이 대거 돈을 빼가면서 주가가 폭락하고 채권금리와 원·달러 환율이 급등하는 악몽을 겪은 것이 단적인 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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