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르헨티나의 28세 청년 미카엘라 말다노씨. 저녁 시간이 되자 그는 부에노스아이레스 외곽에 위치한 한 공원을 찾았다. 공원 한 쪽에 자리 잡고 가지고 온 담요를 펼쳤다. 그리고 담요 위로 헌 옷, 마테차, 배낭 등 여러 물품들을 가지런히 정렬했다. 그가 저녁 시간 그곳까지 간 이유는 다름 아닌 음식과 맞바꾸기 위해서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배고픈 사람들이 많다. 음식 먹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
최근 미국의 한 정치전문지에 실린 기사의 일부분입니다. 현재 아르헨티나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보여주는 것인데요. 빈곤율이 약 60%에 이를 정도로 서민들 삶은 버거워 보입니다. 아르헨티나의 경제 위기, 우리에게 낯설지 않은 주제일 겁니다. 경제난, 인기영합주의(포퓰리즘) 등과 관련한 주제에서 아르헨티나는 늘 빠지지 않고 등장했기 때문이죠. 외신들도 다르진 않습니다. 영미권 언론을 중심으로 아르헨티나를 실패의 교훈, 실패의 교과서 등과 같은 용어를 붙어가며 관련 보도들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런 아르헨티나가 최근 외신 보도에서 비중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물론 맥락은 비슷합니다. 경제 문제죠. 하지만 최근은 하비에르 밀레이 대통령이 추진하는 정책과 그 파급효과가 주목을 받습니다. 심각한 인플레와 경제난을 해결하겠다는 게 그의 생각인데요. 여러 말들이 나오는 거 같습니다. 아르헨티나는 현재 어떤 상황이고 어떻게 해서 여기까지 오게 됐는지 인플레 이슈를 중심으로 살펴 보려고 합니다.
|
◇“자고 나면 물가가 오른다”
아르헨티나 경제 문제의 중심에는 인플레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현지 당국이 밝힌 내용에 따르면 지난해 인플레이션(소비자물가 상승률)은 211%에 달합니다. 지난 30년 만에 가장 큰 상승 수준으로 분석되는데요. 사실상 초인플레이션(하이퍼인플레이션) 수준입니다. 1년 간 물가가 3배 넘게 뛴다는 건 극히 이례적입니다. 다른 국가들과 비교를 위해 IMF 통계를 찾아봤습니다. 전 세계 200여 개 국가 자료를 분석한 것인데 이 기준에 따르면 아르헨티나의 지난해 물가상승률은 전 세계 2위에 해당하는 수준입니다. 1위는 짐바브웨로 778.8%에 수준입니다. 아르헨티나의 뒤를 이은 곳이 베네수엘라로 190%입니다. 그 외에 수단(146.6), 튀르키예(64.8%) 등이 물가가 많이 뛴 국가로 나타납니다. 한국의 지난해 소비자물가가 3%를 넘어선 수준이었는데요. 이런 우리 현실과 비교해서 생각해보면 몇백%씩 물가가 뛰는 상황이 상상이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자고 나면 물가가 오른다’는 말이 크게 틀리지 않아 보입니다.
|
◇페론주의, 인플레의 씨를 뿌리다
아르헨티나의 ‘미친 물가’가 처음 있는 일은 아닙니다. 아르헨티나 경제를 분석한 논문 등을 보면 오히려 아르헨티나 인플레를 ‘만성적’이라는 표현까지 씁니다. 그만큼 이 문제의 근원을 찾기가 쉽지 않다는 말로도 해석됩니다. 실제 2021년과 2022년의 물가상승도 각각 50%, 95% 수준입니다.
아르헨티나 인플레가 가장 심했을 때가 1980년대입니다. 전 아르헨티나 경제부 장관인 도밍고 카발로씨가 쓴 리포트를 참고했습니다. 이에 따르면 아르헨티나의 1980년대 평균 인플레이션은 750.4%에 이릅니다. 1989년의 물가상승률은 4,923.3%입니다. 끔찍합니다.
전문가들은 이 나라 인플레 근원을 우선 페론주의로 꼽습니다. 페론주의란 1940년대와 1970년대 후안 도밍고 페론 전 아르헨티나 대통령이 추진했던 정책과 사상에 뿌리를 둔 정치 이데올로기입니다. 국가 개입을 늘리는 대중주의가 핵심이라고 합니다. 이런 철학에 입각한 당시 정부는 공공지출을 늘렸습니다. 하지만 이는 곧 재정의 압박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당국은 이에 대한 대응으로 통화량을 늘리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이렇게 돈이 풀리면서 인플레의 토대를 마련했다는 게 일치된 시각입니다. 인플레는 화폐와 통화의 문제입니다.
페론주의는 이후 진화를 거치는데요. ‘키르츠네르주의’라 불리는 사상입니다. 과거 2001년 아르헨티나는 ‘디폴트’를 선언하면 국가 부도에 직면한 시기가 있습니다. 이때 대통령이 된 이들이 네스토르 키르치네르와 그의 아내 크리스티나 키르치네르입니다. 페론주의를 계승한 이들의 이름을 딴 사상인 것이죠. 2003년부터 2015년까지 총 정권을 잡은 기간이 10년이 넘는데요. 당시 나라가 망했으니 실업, 빈곤 등 경제가 최악으로 치닫는 건 당연한 수순입니다. 그런데 정부는 사회 통합, 부의 재분배 등을 우선시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정부 지출은 또 다시 늘어납니다. 아래 표에서 볼 수 있듯 2010년 재정적자 규모가 GDP 대비 -1.3%에서 2017년 -6.69%까지 커진 것은 이 때문으로 보입니다. 결국 이렇게 구멍 난 재정은 화를 키웠고 인플레는 일상화됐다는 해석이 나옵니다.
|
◇“의지도 능력도 없는 정치인”…경제를 망치다
아르헨티나 인플레는 정치 불안정과도 무관하지 않아 보입니다. 여러 번 등장한 군사 쿠데타는 그런 상황을 방증합니다. 쿠데타 세력들은 보통 현실 개혁을 명분으로 내거는 경우가 많습니다. 최악의 상태에 직면한 우리 공동체를 구원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뛰어들었다는 식의 주장이 많죠. 하지만 이들 또한 그 결과가 참혹한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아르헨티나에서 1976년부터 1983년까지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잡은 군부는 나라를 더 망가뜨렸습니다는 평가가 많습니다. 이 기간에는 ‘더러운 전쟁’으로 불리는 인권탄압이 벌어졌습니다. 수만명에 이르는 막대한 피해를 낳은 이 당시 경제개혁은 제대로 이뤄질 수 없었습니다. 경제 중심축을 민간으로 돌리려는 시도들은 했지만 한계가 뚜렷했다는 평가가 많습니다. 세계은행(WB)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판단합니다. “정치적 반대 세력에 맞서 폭력적인 투쟁을 벌이고 있던 군부는 심도 있는 경제 개혁을 설계하거나 실행할 의지가 없거나 능력이 없었다.” 적자 보전을 위해 세금 인상 등을 단행하지 않는 대신 손쉽게 차입에 의존했다는 의밉니다. 국가 부채는 점점 늘어나면서 1970년대 중반 월 물가상승률은 20~30%에 이르렀습니다. 여기에 당시 집권 세력은 내부의 불만을 외부로 돌리려는 전략을 취합니다. 이에 영국과의 전쟁(포클랜드 전쟁)를 감행한 것입니다. 군사비 지출 문제로 재정 적자는 더 심해집니다. 사태 해결과는 더 멀어진 셈이죠. 당시 기준으로 전쟁으로 인한 피해가 조단위에 이른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
◇글로벌 환경의 격변, 아르헨 직격탄
아르헨티나 문제가 안에서만 커진 것은 아닙니다. 대외 변수 또한 감안 해야 할 거 같습니다. 1900년 초반 부자의 나라로 불렸던 아르헨티나는 1930년 대공황, 1940년대 세계 2차대전 등을 거치면서 내리막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이후 페론과 군부 정권을 거치면서 1980년대에 문제가 커졌는데요. 특히 이 당시는 오일쇼크를 거치면서 글로벌 금리가 급격하게 오르던 시기입니다. ‘인플레 파이터’ 폴 볼커라고 아시나요. 당시 연준 의장이었던 그는 약 10% 선이었던 미국 기준금리를 약 20% 수준까지 인상하는 조치를 단행합니다. 아래 그래프에서 보이는 것이 이 내용입니다. 다만 문제는 금융 시장 환경이 급변할 때 경제 체력이 튼튼하지 않으면 휘청이게 되는데요. 아르헨티나는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 동안 쌓인 많은 빚의 큰 이자 부담을 감당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때 아르헨티나가 내민 카드 중 하나는 평가절하였습니다. 수지 개선을 위해 통화의 가치를 떨어뜨리려는 시도였던 것이죠. 하지만 이는 결과적으로 물가를 자극 시키는 원인이 되면 5000%에 이르는 초인플레가 나타났습니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후 아르헨티나는 물가 안정을 위해 달러와 자국 화폐를 1:1로 교환할 수 있는 태환제를 도입하게 됩니다. 결과는? 자국 화폐 가치가 높아지면서 물가는 다소 안정되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높아진 통화 가치는 아르헨티나의 수출 경쟁력을 급감시켰습니다. 이런 사태들이 겹치면서 아르헨티나는 2001년 국가 부도 사태를 맞은 것입니다.
|
◇‘남미 트럼프’ 밀레이의 결말은?
자체 개선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마우리시오 마크리 대통령과 같은 우파들은 다른 접근법을 제시했습니다. 정부지출 축소와 통화 평가절하 조치입니다. 돈을 덜 쓰는 상황에서 대외 경쟁력을 회복하겠다는 의도죠. 하지만 큰 변화를 이끌진 못했습니다. 마크리 대통령 집권 시절이던 2019년 아르헨티나는 IMF에 손을 벌리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등장한 인물이 현 대통령 밀레이입니다. 지난달 대통령 취임 100일을 맞은 그는 강경책들을 시행하고 있습니다. 그 또한 아르헨티나의 환율 조정에 나섰습니다. 이에 달러당 페소화 환율을 400달러에서 800달러로 올렸습니다. 앞서 설명한 인플레 200%는 이 조치의 결과입니다. 환율을 올렸다는 건 달러 대비 자국 화폐의 가치가 떨어뜨렸다는 의미입니다. 화폐가 떨어지면 물가는 올라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는 또 중앙은행을 폐쇄하고 페소화 대신 달러화를 써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중앙은행을 없애 돈을 찍어내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것인데요. 물론 달러화를 쓰게 되면 장점은 있을 겁니다. 달러는 전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자산 중 하나입니다. 그렇다고 중앙은행을 폐쇄하면 문제가 해결될까요.
이런 그의 행보를 두고 외신 반응은 엇갈리는 거 같습니다. 병든 경제의 희망이 될 것이라는 논평이 있는 반면 서민 고통을 더 키우고 있다는 평가 또한 상당합니다. 그는 시간이 지나면 상황은 좋아질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이런 그의 공언은 과연 현실이 될 수 있을까요. 많은 이들이 그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