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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가까이 투병하다 보니 이런 날이 오네요. ”
이달 초 삼성서울병원에 외래 진료를 받으러 온 장모(60·여) 씨는 “암과 고독한 싸움을 벌이던 환자와 가족, 의료진들의 간절함이 기적을 만들었다”며 눈물을 훔쳤다. 장씨는 이날까지 유방암 치료제 ‘엔허투(성분명 트라스투주맙 데룩스테칸)’를 총 8차례 투여 받았다. 작년 10월부터 3주에 한번 꼴로 주사를 맞으러 다닌 지도 어느덧 6개월째다. 얼핏 새로울 것 없어 보이는 일상이지만 이날 진료는 장씨에게 특별했다. 고대하던 엔허투의 건강보험 급여 적용 후 첫 방문이기 때문이다.
엔허투는 암세포 표면에 발현되는 특정 표적 단백질에 결합하는 ‘트라스트주맙’과 동일한 구조의 단일클론항체(antibody)와 강력한 세포사멸 기능이 있는 국소이성화효소 저해제(Topoisomerase I inhibitor) 페이로드를 종양 선택적 절단 링커로 연결한 항체약물접합체(ADC·Antibody Drug Conjugate)다. 암환자에게 투여하면 항체가 암세포의 표적 항원에 결합해 세포 안으로 침투하고 세포 소기관인 리소좀(lysosome)에서 분해돼 세포질로 약물을 방출한다. 이 약물이 세포 분열과 성장을 억제해 암세포를 사멸시키는 것이다. ‘유도미사일’인 항체에 ‘핵탄두’인 항암제를 결합시킨 다음 암세포를 추적해 파괴하는 개념이라고 이해하면 쉽다.
ADC는 표적에 선택적으로 작용하는 항체 약물의 원리를 활용해 강력한 암세포 사멸 효과를 나타내면서도 부작용을 최소화했다. 엔허투는 높은 세포막 투과성을 갖는 페이로드를 통해 표적 종양세포 뿐 아니라 인접한 종양세포의 사멸까지 유도한다. 1세대 ADC ‘캐싸일라(성분명 트라스트주맙 엠탄신)’보다 한 단계 진보했다는 뜻에서 2세대 ADC라고도 불린다.
장씨와 김지연(사진) 삼성서울병원 혈액종양내과 교수의 인연도 바로 이 약물에서 비롯됐다. 2015년 왼쪽 가슴에 딱딱한 멍울이 만져져 가까운 대학병원을 찾았다가 유방암 1기 진단을 받았다는 장씨. 진단 직후 수술로 암덩어리를 도려 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암이 재발했고 10년째 지난한 싸움을 이어오고 있다. 장씨가 앓는 인간상피성장인자수용체 2형(HER2) 양성 유형은 전체 유방암의 약 15~20%를 차지한다. 완치도 어렵지만 암세포 성장이 빠르고 쉽게 확산되어 다른 부위로 전이되거나 재발할 위험이 높다.
장씨는 방사선치료에 이어 항암치료를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리 독한 약을 맞아도 몇 달 뒤면 내성이 생겼고 뼈를 넘어 폐·간 등 다른 장기로 암세포가 번졌다. 2020년 8월 유방암 환우 카페에서 미국식품의약국(FDA) 허가를 받은 엔허투의 소식을 접한 딸의 손에 이끌려 삼성서울병원을 찾은 게 김 교수와의 첫 대면이었다. 당시 엔허투는 국내 허가 전이라 임상 연구를 통해서만 투여가 가능했는데 장씨는 이미 3차 치료 중이라 임상 참여 조건이 되질 않았다. 그 때 망연자실하던 장씨의 표정을 읽었던 걸까. 김 교수는 장씨처럼 투병 기간이 긴 유방암 환자가 참여할 만한 임상연구 기회나 엔허투 등 신약 허가 관련 상황을 수시로 공유해 주었다고 한다.
장씨가 엔허투를 맞기 시작한 건 2022년 9월 식품의약품안전처의 허가를 받고도 1년이 훌쩍 지나서였다. 비급여 상태에서 엔허투 1바이알(100㎎)의 가격은 230만 원 내외였다. 일단 치료를 시작하면 3주마다 주사를 맞아야 하는데 장씨와 같은 전이성 유방암 환자는 회당 3~4바이알이 필요했다. 1년치 약값만 8300만 원이라 건보 적용이 되기만 기다리던 중 뇌 전이가 왔다. 혼자 걸을 수조차 없는 지경에 이른 장씨가 투여를 결심한 엔허투는 유방암 진단 이후 무려 9번째로 맞는 약이었다.
김 교수는 “엔허투가 뇌전이 환자를 상대로 뛰어난 치료 효과를 입증한 연구 결과가 있었지만 워낙 고가 약제라 선뜻 권하기 어려웠다”며 “환자가 왼쪽 몸에 전혀 힘이 들어가지 않는 증상을 보였고 기존 약도 듣질 않아 오랜 시간 논의한 끝에 치료를 결정했다”고 설명했다. 7번의 투약을 진행하는 동안 장씨의 뇌에 전이된 종양의 크기는 눈에 띄게 줄었다. 구역감· 손발 저림 등 기존 항암치료 내내 증상들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병원을 찾는 장씨의 얼굴에는 근심이 서려 있었다. 컨디션이 좋아질수록 ‘이 비싼 약을 언제까지 맞아야 하나’ 하는 생각과 가족들에 대한 미안함이 몰려왔던 탓이다.
엔허투의 급여 적용을 애타게 기다린 건 장씨만이 아니었다. 전이성 유방암 환자에게 세포독성 항암제들을 썼을 때 암의 진행 없이 생존하는 무진행생존기간(mPFS) 통상 2~3개월(중앙값), 길어야 6개월 정도다. 반면 임상시험에서 엔허투를 2차 치료에 사용한 환자들은 임상시험에서 28.8개월의 mPFS을 보였다. 엔허투는 유방암 외에도 암세포에 HER2 단백질이 발현되어 있는 암종에 효과를 보여 ‘암종 불문 항암제’로 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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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같은 효과가 알려지면서 지난 2년간 엔허투의 허가와 급여 적용을 촉구하는 국민 청원이 6건 제기됐다. 이들 청원에 동의한 인원은 15만 명이 넘는다. 장씨의 딸도 1년 전 직접 국민 청원글을 올려 5만 명의 동일을 얻었다. 장씨는 “이달부터 엔허투의 건보 적용으로 치료비 부담이 크게 줄었다. 병원에 오는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졌다”며 미소를 지었다. 김 교수는 “치료비 부담 때문에 다른 약을 쓰는 환자에게 내성이 발생했다는 소식을 전할 때마다 마음이 무거웠다”며 “엔허투의 급여를 손꼽아 기다리던 많은 환자들이 혜택을 입게 되어 다행스럽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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