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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2020년 이후 4년 만에 고속철과 다중로봇의 신규 지정을 포함해 국가핵심기술을 대대적으로 재정비한 것은 최근 기술 유출 사례가 잇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산업통상자원부와 국가정보원에 따르면 2019년부터 지난해까지 5년간 적발된 국가핵심기술 해외 유출 사례는 33건에 달한다. 같은 기간 산업기술 유출에 따른 피해액은 약 26조 원으로 추정된다. 지난해 산업기술 유출 건수는 23건으로 최근 5년 중 최대치를 기록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고속철 수출이 늘며 관련 기술 유출 우려가 덩달아 커지고 있다. 국내 대표 고속철도 업체인 현대로템의 핵심 기술이 대표적이다. 현대로템은 2022년 사우디아라비아의 대규모 인프라 프로젝트 ‘네옴시티’에 고속철을 공급하기 위한 업무협약(MOU)을 맺었다. 현대로템은 우크라이나 측과 전후 재건 과정에서 고속철도를 공급하는 방안도 논의하고 있다. 폴란드 역시 잠재적 수출 시장이다. 산업부가 고속철 차체 설계·해석 및 제조 기술을 국가핵심기술로 신규 지정한 것도 이 때문이다. 산업부 관계자는 “고속철 수출이 증가하면 그만큼 기술 유출 가능성도 높아질 수 있다”며 “(수출 확대로) 기술 안보 강화 필요성이 커진 만큼 고속철 관련 기술을 국가핵심기술로 선정했다”고 밝혔다.
아직 상용화되지 않았지만 잠재성이 큰 기술도 있다. 산업부가 이번에 국가핵심기술로 지정한 발전용 수소터빈의 경우 현재 개발 단계에 있지만 향후 시장성은 작지 않다는 분석이다. 국내에서는 두산에너빌리티가 2027년 상용화를 목표로 400㎿급 수소터빈을 개발하고 있다.
다중로봇도 상황은 비슷하다.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에 따르면 다중로봇의 일종인 협동로봇 분야 글로벌 시장은 지난해 24억 7107만 달러(약 3조 3000억 원)에서 내년 50억 8849만 달러(약 6조 8000억 원)로 2배 가까이 성장한다. 산업부가 이번 개정을 통해 단순히 로봇으로 명시된 국가핵심기술을 다중로봇으로 구체화한 것도 이런 기술 변화를 고려했다.
전문가들은 국가핵심기술 지정은 최소한의 장치이며 경제안보를 지키기 위한 대응 전략을 더 고도화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실제 국내 기업의 해외 소재 모회사를 인수하거나 산학 공동 연구를 명목으로 국내 연구소를 설립해 첨단 기술을 빼가는 거점으로 활용하는 등 유출 수법이 복잡해지고 있다. 주제네바 대사를 지낸 최석영 법무법인 광장 고문은 “한국은 최근까지 외국인 투자를 늘리는 데만 집중해 기술 유출 방지를 위한 외투 심사가 취약한 편”이라고 강조했다.
기술 유출범에 대한 솜방망이 처벌도 문제로 꼽힌다. 대법원 사법연감을 보면 2022년 선고된 기업 영업비밀의 해외 유출에 대한 평균 형량은 약 1년 3개월에 그쳤다. 2021년에는 산업기술보호법 위반으로 재판에 넘겨진 1심 사건 33건 중 무죄와 집행유예가 87% 이상을 차지했다. 최 고문은 “기술 유출의 심각성은 커지고 있지만 산업 스파이 처벌을 위한 입법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며 “국가적 차원에서 문제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처벌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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