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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증명 서류도 없이 ‘홍콩 ELS’ 대리가입…위법 판친 현장 ‘요지경’

데일리안 조회수  

어머니에게 딸 이름으로 서명 유도

담당자 아무리 바뀌어도 문제 여전

법 넘나든 영업…”무권대리 사례”

도덕적 해이에 무너진 판매 시스템

홍콩 항셍중국기업지수 주가연계증권 피해자들이 집회를 하고 있다.ⓒ뉴시스
홍콩 항셍중국기업지수 주가연계증권 피해자들이 집회를 하고 있다.ⓒ뉴시스

홍콩 항셍중국기업지수(H지수) 주가연계증권(ELS) 불완전판매가 도마 위에 오른 가운데 은행이 ELS 대리 가입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받아야 할 서류를 생략하고 계약을 체결한 사실이 드러나 논란이 일고 있다. 특히 수년에 걸쳐 재가입이 이뤄지는 동안 담당자가 여러명 바뀌었는데도 같은 방식으로 ELS가 판매돼 단순히 개인의 일탈로 치부하기 어렵다는 비판이다. 실적 쌓기에 눈이 먼 은행원의 도덕적 해이와 더불어 취약한 상품 판매 시스템이 불완전판매를 걸러낼 자정 능력을 상실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20일 데일리안 취재를 종합하면 경기도 고양시 소재 NH농협은행 한 영업점을 방문한 모녀는 2016년 10월 은행원의 권유로 홍콩H지수 ELS에 신규 가입했다. 당시 모녀는 예금 상품에 가입하기 위한 목적으로 영업점을 방문했지만, 은행원은 “수익률이 낮다”는 이유로 ELS를 적극 권유했다. 은행원의 말을 신뢰한 모녀는 홍콩H지수 ELS에 목돈을 넣었다.

문제는 딸이 해외로 유학을 떠난 이후 ELS 상환일이 돌아오면서 시작됐다. 이에 어머니가 2017년부터 2021년까지 6차례에 걸쳐 딸을 대신해 홍콩H지수 ELS의 재가입을 진행했다.

그런데 은행원은 어머니가 딸을 대신해 ELS 재가입을 진행하는데도 대리 가입에 필요한 서류를 요구하지 않았다. 통상 신탁 상품을 대리 가입할 때는 신탁위임장·실명확인증·인감증명서(3개월 이내 발급) 등을 은행에 제출해야 한다. 이때 신탁위임장은 신용정보법에 따라 가입자 본인의 동의가 필요하며, 직접 위임장에 서명도 해야 한다.

딸이 해외에 있어 해당 서류들을 마련하기 어렵자, 은행원이 딸의 이름으로 계약서에 서명할 것을 유도했다는 게 어머니의 주장이다. 또 ELS는 대리 가입이어도 계약이 진행될 때마다 가입자의 투자 성향을 분석해야 하는데, 이 과정도 생략됐다. 심지어 딸을 대신해 어머니가 ELS에 수차례 재가입하는 동안 부지점장을 포함해 담당 행원이 4명이나 바뀌었는데도 그 누구도 이를 문제 삼지 않았다는 지적이다.

실제 모녀가 조회한 ‘출입국에 관한 사실 증명’ 내역을 살펴보면 ELS의 마지막 재가입이 이뤄졌던 지난 2021년 1월 15일에 딸은 해외에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딸은 2020년 12월 27일 출국해 이듬해인 2021년 8월 19일에 입국했다. 결과적으로 은행원이 대리 가입에 필요한 서류를 받지 않고, 주먹구구식으로 계약을 체결한 셈이다.

현재 딸이 가입한 ELS는 올해 1월 22일 만기가 돌아오면서 50% 이상의 원금 손실을 본 상태다. 어머니는 “최근 ELS 사태가 터지고 나서야 대리 가입할 때 가족관계증명서 같은 것을 제출해야 한다는 걸 알게 됐다”며 “작년 말에 귀국한 딸과 같이 영업점을 방문해 지금까지 체결된 계약서를 전부 받아봤는데, 가족관계증명서 등 대리 가입에 필요한 서류의 사본은 제출한 적이 없기 때문에 당연히 받지 못했다”고 하소연했다.

대리 가입으로 체결된 투자자 확인서.ⓒ제보자 제공
대리 가입으로 체결된 투자자 확인서.ⓒ제보자 제공
김씨가 2020년 12월 27일에 출국해 이듬해인 2021년 8월 19일에 입국했음을 보여주는 출입국에 관한 사실 증명서.ⓒ제보자 제공
김씨가 2020년 12월 27일에 출국해 이듬해인 2021년 8월 19일에 입국했음을 보여주는 출입국에 관한 사실 증명서.ⓒ제보자 제공

이처럼 은행원들이 ELS를 무리하게 팔아치운 근본적 배경엔 판매 실적과 연동된 성과 평가가 자리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은행 본점 차원에서 핵심성과지표(KPI) 배점에 고위험 ELS 판매 실적을 높은 비중으로 반영하면서 은행원들의 공격적 영업을 부추겼다는 것이다. 금융감독원도 최근 현장검사를 통해 불완전판매 사례를 대거 적발하고, 그 원인으로 은행의 KPI를 지목했다.

특히 이번 사례에서는 ELS 재가입이 진행된 5년간 부지점장을 포함해 4명의 담당 행원 중 그 누구도 이를 문제 삼지 않았다는 점에서 비판을 피해갈 수 없는 상황이다. 은행원 개인의 도덕적 해이를 넘어 은행의 상품 판매 프로세스의 취약점이 고스란히 드러났다는 지적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한 법무법인 변호사는 “대리권이 없는데 멋대로 서명을 하게 해 계약을 체결했다면, 무권대리(대리자에게 대리권이 없는 경우)가 적용될 수 있다”며 “금융기관이라면 금융 상품을 계약할 때 대리권 여부에 대해 보다 엄격하게 심사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데일리안
content@newsbel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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