밸류업 기조에 기업들 배당정책 개선 바람
주주제안 전략 변화·개인투자자 결집 부각
단기성과 치중 우려도…“중장기 관점 필요”
올해도 어김없이 정기 주주총회 시즌이 돌아왔다. 연초부터 화두로 대두된 코리아 디스카운트(국내 증시 저평가 해소)에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 추진 발표로 주주환원과 주주가치 제고에 대한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 높아진 상황이다. 이에 올해 주총에서도 소액주주들의 결집과 행동주의펀드들의 공세 강화로 뜨거운 열기를 예고한 상태다. 올해 주총에서 나타날 이슈들과 주목할 점을 살펴본다. [편집자 주]
3월 정기 주주총회와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이 맞물린 가운데 소액주주 및 행동주의 펀드의 활동이 활발해지고 있다. 이에 상장사들이 주주환원 정책을 고민하면서 공격적인 행동주의 행보가 완화되거나 최대주주·연기금 등과 단합하는 등 전략의 변화도 나타나고 있어 주목된다.
7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3월 주총 시즌을 맞아 소액주주와 행동주의 펀드가 주주가치 제고에 뛰어들면서 강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행동주의 펀드들이 서로 연대해 목소리를 키우는 이른바 울프팩(wolf pack·늑대 무리) 전략도 눈에 띈다. 오는 15일 주총을 앞둔 삼성물산이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영국계 자산운용사 시티오브런던과 미국계 화이트박스어드바이저스, 국내 안다자산운용 등 5개 행동주의 펀드 연합은 올해 주총 시즌을 앞두고 삼성물산에 5000억원 규모 자사주 매입과 보통주 1주당 4500원(우선주 4550원) 배당 등을 요구했다. 이는 삼성물산 이사회가 제시한 보통주 1주당 2550원(우선주 2600원)보다 75% 많은 규모다.
업계는 지난달 26일 금융당국이 일본을 벤치마킹한 ‘기업 밸류업 지원 방안’을 발표한 것을 발단으로 행동주의 펀드의 영향력이 더 커질 것으로 보고 있다. 국내 상장사들의 저평가 해소를 정부가 천명한 만큼 주주 환원에 명분이 생긴 것이다.
그동안 행동주의 펀드의 제안에 소극적으로 응대해온 기업들이 최근 배당을 늘리고 자사주를 소각하고 있는 것도 이같은 이유에서다. 상장사들이 앞다퉈 주주친화 정책을 수립하면서 기업들과 소통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행동주의 펀드들도 등장하고 있다.
지난해 SM엔터테인먼트 경영권 분쟁에서 목소리를 낸 얼라인파트너스자산운용은 올해 들어 7개 금융지주사를 상대로 주주환원책을 요구했지만 별도 주주제안은 하지 않았다. 해당 금융지주사들이 얼라인파트너스의 요구사항을 어느 정도 수용한 데 따른 것이다. 얼라인파트너스는 JB금융지주에 대해서만 이사 후보 추천과 증원 요구를 한 상태다.
트러스톤자산운용의 경우 태광산업을 상대로 이사 후보를 추천하는 주주제안을 했지만 타 기업에 대해선 주주제안을 하지 않았다. 대신 태광산업을 비롯한 캠페인 대상 기업들과 요구 사항을 대화로 풀어가겠다고 강조했다.
김종영 IBK투자증권 연구원은 “일본 사례처럼 국내 기업을 대상으로 행동주의 펀드들의 주주제안이 증가할 것으로 예상되지만 기업들이 무조건적인 방어적 자세보다 소통을 통한 기업가치 증가를 목표로 대화하거나 행동에 나설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과거 기업들에게 큰 위기의식을 주지 못했던 주주 행동주의가 성장하면서 최대주주와 연기금 등과 연대해 다변화된 전략을 펼치는 곳들도 늘어나고 있다.
싱가포르계 행동주의 펀드 플래시라이트캐피탈피트너스(FCP)는 차기 사장 선임 문제를 놓고 KT&G와 맞붙으면서 국민연금에 의결권 행사로 대표 선임 과정에 적극 개입할 것을 촉구하는 서한을 보냈다. KCGI자산운용의 경우 경영권 분쟁 중인 고려아연이 오는 19일 주총을 앞둔 가운데 배당·정관 변경 등 안건에서 대주주 영풍의 손을 들어주기로 했다.
금호석유화학은 1290억원 규모의 자사주를 소각하기로 결정했는데 이는 개인 최대주주인 박철완 전 상무와 차파트너스자산운용 측 요구를 받아들인 것이다. 차파트너스는 박찬구 금호석화그룹 회장의 조카인 박 전 상무로부터 주주제안권을 위임받은 행동주의 펀드다.
올해부터 주총에서 소액주주들의 입김이 거세질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소액주주들의 의견을 결집하는 플랫폼들이 등장하면서 이들이 뜻을 모을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됐기 때문이다.
소액주주연대 플랫폼 ‘액트’를 보면 올해 이 플랫폼 한 곳에만 20여곳의 기업에 주주제안이 제출됐다. 상장폐지 위기에 처한 이화전기, 이아이디, 이트론 등 이화그룹 3사를 비롯해 DB하이텍, DI동일, DMS, 강스템바이오텍, 뉴지랩파마, 대양금속, 디에스케이, 삼목에스폼, 아난티, 알파홀딩스, 오로라, 캐스텍코리아, 코나아이, 포인트모바일, 한송네오텍, 휴마시스 등이다.
상법상 의결권이 있는 지분을 전체의 3% 이상 확보하거나 1% 이상의 지분을 6개월 이상 보유한 주주는 ‘주주제안권’을 행사할 수 있다. 그간 소액주주들은 지분이 많은 이른바 ‘슈퍼개미’ 없이는 지분을 모으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러나 최근 소액주주 플랫폼들을 통해 주주인증과 전자 위임이 간편해지자 각 회사의 소액주주연대가 뭉치면서 이들의 지분율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밸류업 정책을 계기로 기업들이 소액주주들의 요구를 과거보다 심도 있게 검토할 것이란 기대감도 작용했다.
다올투자증권 최대주주 이병철 회장 측과 경영권 분쟁 중인 2대주주 김기수 프레스토투자자문 대표는 15일 주총을 앞두고 주주 행동주의 플랫폼 ‘비사이드코리아’에서 전자위임을 촉구하기도 했다. 김 대표는 회사 정상화 전까지 최대주주와 함께 배당을 받지 않겠다며 소액주주들의 참여를 권하고 있다. 다올투자증권의 소액주주 지분율은 약 62%에 달한다.
소액주주들과 회사 경영진의 법적 공방도 늘고 있다. DI동일 소액주주연대는 주주제안권을 행사했지만 사측이 주총 안건으로 상정하지 않자 법원에 가처분 신청을 제기한 상황이다. 대양금속 소액주주연대와 삼보판지 소액주주들도 사측 경영진을 상대로 소송까지 불사하면서 주주가치 제고에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다만 상장사들은 주주환원 확대의 필요성에 공감하면서도 기업 활동의 위축을 우려하고 있다. 단기 주가 상승에만 초점을 맞춘 주주 제안이 많아지고 있는 데다 행동주의 펀드의 과도한 요구가 경영권 불안을 야기할 수 있어서다.
재계 한 관계자는 “기업들이 주주 가치를 높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점에는 이견이 없겠지만 행동주의 펀드가 단기 차익실현이나 성과에 치중하는 것은 우려가 크다”며 “기업들이 경영권을 보호할 수 있도록 안전장치를 두고 중장기에 걸쳐 설득·변화시키는 방향성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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