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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가 내놓은 12단 5세대 고대역폭메모리(HBM) 제품인 HBM3E는 인공지능(AI) 반도체 열풍에서 소외됐던 삼성이 준비한 비장의 무기다. 현재 전체 D램 시장에서 45% 수준의 압도적 점유율을 기록하고 있는 삼성전자의 리더십을 HBM 시장에서도 차지하겠다는 삼성의 강력한 의지가 선단 제품 최초 개발로 이어졌다는 게 반도체 업계의 분석이다. HBM 시장에서 추격자가 아닌 기술 리더로서 다시 한번 초격차 전략을 펼쳐 시장점유율을 높인다는 게 삼성의 구상인 셈이다.
다만 후발 주자였던 마이크론의 도전과 HBM 분야에서 이미 상당한 경쟁력을 쌓은 SK하이닉스의 노하우는 삼성전자에 위협 요인이다. HBM 3파전 양상이 뚜렷해지면서 신기술 선점과 함께 수율과 수익성 경쟁이 더욱 치열하게 전개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HBM은 AI 시대에 반드시 필요한 고성능 메모리로 꼽힌다. 범용 D램보다 데이터 출입구가 많아서 정보 전송속도가 빠르고 여러 개의 D램을 쌓았기 때문에 저장 용량이 큰 것이 장점이다. 다수 D램을 수직으로 쌓고 연결할 때 실리콘관통전극(TSV) 등 고급 기술을 쓰기 때문에 가격이 비싼 것은 단점이지만 강력한 성능을 바탕으로 엔비디아와 같은 AI 가속기 업체의 수요를 빨아들였다.
HBM의 또 다른 특징은 기존 D램 시장의 판도를 완전히 뒤집었다는 점이다. 가령 HBM 시장에서 먼저 승기를 잡은 회사는 세계 D램 2위 SK하이닉스다. SK하이닉스는 현재 AI 반도체 최강자 엔비디아와의 공고한 협력으로 HBM 시장에서 50% 이상의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다. SK하이닉스는 올 1월 8단 HBM3E 초도 양산을 시작하기도 했다. SK하이닉스 관계자는 “가까운 시일 내 고객 인증을 완료해 본격 양산에 돌입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 시장에서 10% 이하의 점유율로 삼성전자·SK하이닉스에 비해 후발 주자로 평가받던 마이크론이 빠른 속도로 시장에 진입하고 있는 것도 주목해야 할 지점이다. 업계에서는 마이크론의 이번 8단 HBM3E 양산과 엔비디아 퀄(승인 작업) 완료가 예상보다 1~2개월 더 빨랐다고 보고 있다. 아직 HBM3E 수율과 생산능력이 1위 SK하이닉스에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지만 선두 업체와 비슷한 보폭으로 기술 개발과 양산이 이뤄지고 있다는 점은 한국 업체들에 큰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의견도 제기된다. 산제이 메흐로트라 마이크론 최고경영자(CEO)는 “마이크론은 2025년 내 HBM 분야에서 범용 D램 시장 점유율(약 25%)까지 확보할 것”이라고 밝혔다.
삼성전자가 12단 5세대 HBM으로 일단 선단 제품 경쟁에서 한발 앞서나가기는 했지만 넘어야 할 산도 적지 않다. 특히 SK하이닉스·마이크론 등 라이벌 회사들이 엔비디아의 8단 HBM3E 양산 테스트를 통과하고 양산을 준비하고 있는 것과 달리 삼성전자는 아직까지 퀄(품질) 테스트 성공 여부를 공개적으로 밝히지 않고 있다. 고객의 주문과 양산이 동시에 이뤄지는 HBM의 특성을 감안하면 한 단계 이상 경쟁에 뒤처진 셈이다. 물론 삼성이 개발한 12단 제품이 내년 이후 생산되는 엔비디아의 차기 그래픽처리장치(GPU)에 탑재될 경우 시장 판도는 또다시 달라지게 된다.
반도체 업계의 한 관계자는 “삼성전자가 2010년대 말 D램 분야 최전성기를 누릴 당시 HBM 투자에 대한 의사 결정 과정이 늦었다”며 “12단 HBM3E 양산 결과가 분수령이 될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업계에서는 결국 HBM 3파전에서 ‘수율’과 ‘수익성’을 잡는 회사가 리더십을 쥘 것으로 보고 있다. 시장조사 업체 욜그룹에 따르면 업체 간 경쟁과 함께 기술 성숙도가 올라가면서 HBM 용량당 가격이 점차 감소할 것으로 보인다. 욜그룹 측은 “현재 범용 D램에 비해 6배 높은 가격 프리미엄이 2028년에는 3배 수준으로 낮아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따라서 각 회사가 선택한 HBM 공정이 어느 정도의 생산성을 담보할 수 있는지도 또 다른 관전 포인트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SK하이닉스는 HBM3부터 자체 개발한 매스리플로-몰디드언더필(MR-MUF) 공정을, 삼성과 마이크론은 기존 공정을 업그레이드한 열압착-비전도성접착필름(TC-NCF) 방식을 택했다. 한 업계 관계자는 “차세대 D램 결합 기술로 알려진 ‘하이브리드 본딩’ 기술의 주도권을 누가 잡을 것인지도 관건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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