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권사가 채권형 랩어카운트(랩)와 특정금전신탁(신탁)을 운용하면서 만기 미스매칭 전략을 활용해 고객의 수익률을 돌려막은 정황이 무더기로 적발돼 손실 배상 절차에 착수했다. 금융당국은 증권사가 위법을 저지른 고객 계좌에 한해 회사 고유자산으로 배상 안을 허용했다.
19일 금융투자업계 등에 따르면 금융당국은 증권사의 운용상 위법행위로 손실이 발생한 랩·신탁에 대해 고유자산 편입을 허용했다. 증권사가 법을 위반해 상품을 운용했고, 이 탓에 고객의 손실이 발생한 것이니 만큼 증권사가 고객의 계좌에 담긴 채권을 떠안아도 된다는 뜻이다.
자본시장법상 신탁업자(통상 증권사)가 신탁자산으로 자신의 고유자산과 거래하면 이는 불건전 영업행위다. 단 수익자를 보호하기 위한 거래는 불건전 영업행위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게 당국 입장이다.
금융당국은 증권사의 불법 거래로 손실을 입은 랩·신탁 고객의 채권을 고유자산으로 매입하는 건 단서 조항인 ‘수익자 보호’라고 판단했다.
채권형 랩·신탁은 증권사가 고객과의 1:1계약을 통해 자산을 운용하는 상품이다. 펀드와는 달리 개별 고객의 투자목적과 자금수요를 감안한 단독 운용이 특징이다. 따라서 랩·신탁 상품을 운용할 때 특정 투자자의 이익을 해하면서 자기 또는 제3자의 이익을 도모해서는 안된다.
국내 증권사가 채권형 랩어카운트(랩)·특정금전신틱(신탁)을 운용하면서 위법 사항을 대거 저지른 것으로 드러났다. 금감원은 지난해 12월 9개 증권사의 업무 실태를 검사했고, 모든 증권사에서 예외없이 위법 행위가 발견됐다.
실제로 A증권사는 특정 고객 계좌의 CP를 다른 고객의 계좌로 고가 매도해 5000억원 규모의 손실을 고객 간 전가하는 방법을 썼다. 비정상적인 가격 거래로 고객의 수익률을 돌려 막은 셈이다. B증권사는 직접 고객의 랩·신탁에 있는 CP를 고가 매수해 1100억원 규모의 이익을 제공했다. 금융투자업자는 투자자에게 일정한 이익을 사후 제공해선 안 된다는 원칙을 위반한 것이다.
금감원은 위 조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적법한 손해 배상 절차 등을 통해 환매가 이뤄질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고객의 신탁자산을 증권사 고유자산으로 편입해도 된다는 전향적인 당국 해석 역시 이 차원에서 나온 것이다.
이는 증권사가 고객에게 환매를 해주기 위해 무리하게 채권을 시장에 내다 팔 경우 물량이 쏟아져 가격이 왜곡될 가능성을 염두에 둔 조치다. 또 채권은 만기까지 갖고 있기만 하면 원금과 이자를 받을 수 있어 고객의 채권을 증권사가 받아내도 장기적으로 큰 손실은 없을 것이라 점도 고려했다.
하지만 랩·신탁의 불건전 영업 행위로 금감원으로부터 지적을 받은 9개 증권사 중 고객에게 손해를 배상한 증권사는 2곳에 불과했다. 지난해 NH투자증권이 180억원, SK증권이 100억원 규모를 물어줬다.
나머지 KB증권, 교보증권, 미래에셋증권, 유안타증권, 유진투자증권, 하나증권, 한국투자증권은 손해 배상 절차를 밟지 않고 있다. 이들 증권사는 금감원과 의견서를 주고 받으며 배상 기준을 검토 중이다.
금감원은 랩·신탁 불건전 영업 행위에 연루된 운용역 약 30명을 특정한 상태다. 운용역은 물론 운용역에게 해당 행위를 지시한 자가 있다면 그 윗선까지 징계 대상에 오를 전망이다. 금감원은 이르면 다음 달 징계 절차를 시작할 방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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