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의과대학 입학정원 확대 추진에 반발한 전공의들의 집단 사직서 제출이 전국으로 확산하는 가운데 정부가 이들의 공백을 진료보조(PA·Physician Assistant) 간호사로 메우겠다고 선언하며 보건의료계 혼란이 가중되고 있다. 의료법상 명시되지 않아 불법으로 간주되고 있는 PA를 의료대란을 막기 위한 임시방편으로 꺼내든 셈인데, 간호사단체가 “정부와 사전 협의된 바 없다”고 일축하며 상황이 더욱 복잡해졌다.
빅5 병원( 전공의들이 집단 사직서 제출 시한으로 지목한 19일 박민수 보건복지부 제2차관은 19일 KBS1 라디오 ‘전종철의 전격시사’ 전화 인터뷰를 통해 “(진료 차질이) 장기화되면 2단계로 외부에서 필요한 인력을 투입하고 경증 환자들은 협력병원 등에 가도록 연계, 관련 수가를 지원해 뒷받침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여기서 언급한 외부 인력은 PA 간호사를 의미한다. 앞서 박 차관은 지난 15일 또다른 라디오 방송에서도 “(전공의 파업 시) 비대면 진료를 전면 확대하고 PA 지원인력이 좀 더 적극적인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강구하겠다”고 발언한 바 있다.
정부는 의료계 집단행동에 따른 진료 공백을 최소화하기 위해 지방의료원, 국군병원, 비대면 진료 등을 가동하겠다는 방침이다. PA 인력과 비대면 진료 허용은 의사단체가 강력하게 반대해 온 보건의료정책으로 꼽힌다. 의료계 일각에서는 ‘전공의들이 파업에 나서면 PA 간호사로 대체하겠다’는 박 차관의 발언이 전공의 등 젊은 의사들의 반발을 키웠다는 지적도 나온다.
의대 증원을 포함한 정부의 의료 개혁을 적극적으로 지지해 온 간호사단체도 ‘PA 활용’ 계획에 제동을 걸면서 정부의 대응 기조에 차질이 예상된다.
|
대한간호협회는 이날 오전 입장문을 통해 “PA 간호사를 적극 활용하겠다는 정부 발표와 관련해 그 어떤 협의도 진행한 바 없었으며 정부 방침에 협조하기로 결정한 바도 없다”고 못 박았다. 전공의들의 집단행동에 따른 피해를 최소화하고 의료 공백을 메우는 데 참여할 의향이 있지만, 간호사에 대한 피해 방지 대책 마련이 선행돼야 한다는 게 협회의 입장이다.
PA는 의료기관에서 진료의사 부족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운영하는 인력을 통칭하는 용어다. 주로 전공의가 부족한 소위 ‘기피 진료과’에서 봉합·절개·처방 등의 업무를 수행한다. 미국, 영국, 캐나다 등 주요 선진국에서는 PA 면허를 운영하지만 국내에서는 의료법상 규정되어 있지 않아 면허사항 이외의 의료행위로 간주되고 있다. PA 업무의 대부분을 간호사들이 대체하다 보니 흔히 PA 간호사로 불리는데 응급구조사, 임상병리사 등 다른 면허체계에 놓인 인력들도 적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기피과의 대명사격인 흉부외과·외과 등에서는 “PA 없이 정상적인 업무가 불가능하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필수 인력으로 자리를 잡았다.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 등에 따르면 이미 현장에 1만 명 이상의 진료지원인력이 존재한다. ‘전공의의 수련환경 개선 및 지위 향상을 위한 법률’ 시행으로 전공의의 주당 근무시간이 100시간에서 88시간으로 줄어들면서 이들의 빈 자리를 대체할 PA 수요는 나날이 높아지고 있다. 문제는 현행법상 불법이다 보니 병원 내 ‘공공연한 비밀’로 운영된다는 점이다. 2020년 보건의료노조가 공개한 실태조사 결과 PA 간호사는 △의사 아이디로 처방 △전공의 없는 진료과에서 대리수술 △전공의가 없는 경우 환자 치료방향 결정 △동맥관 채혈 △수술·시술에 대한 동의서를 의사 이름으로 받기 △의사 가운 입고 환자 회진 등 환자의 건강에 직결되는 ‘대리의사’ 업무를 수행한 것으로 확인됐다. 하지만 불법 소지가 있다 보니 교육과정이 전무한 데다 PA 근무기간을 간호사 경력으로 인정해주는 경우도 드물다.
간호협이 의료 현장 공백을 최소화하는 데 힘을 보태겠다면서도 ‘PA 간호사’에 관해 사전 협의를 강조하는 건 작년 5월 국회 통과 목전에서 폐기됐던 간호법과도 맞닿아있다. 간호협은 대리처방, 채혈, 대리기록, 동맥혈 채혈 등 의료법상 간호사 면허 범위에 해당하지 않는 불법진료 행위를 단절하고, 간호사의 업무 영역을 명확하게 하기 위해 간호법 제정이 필수적이라고 강조해 왔다. 일선 의료기관에서 버젓이 불법진료 행위가 이뤄지는 데는 이를 묵인해 온 복지부의 책임이 크다는 비난의 목소리도 높다. 작년 5월 윤석열 대통령의 재의요구권(거부권) 행사로 간호법 제정안이 폐기되자 간호사 4만 3000여 명의 면허증을 복지부에 반납하고 법의 테두리를 벗어나는 의료행위를 거부하는 준법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복지부가 간호사들을 달리기 위해 작년 6월 ‘PA 개선 협의체’를 꾸려 논의를 시작했지만 아직까지 별다른 진척은 없는 실정이다.
PA 간호사들은 2020년 정부의 의대 증원 추진에 반발해 전공의들이 대거 파업에 나섰을 당시 의사들이 하던 업무를 상당수 대체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몇몇 간호사들이 무면허 의료행위를 시행했다는 이유로 고발을 당했고, 관련 병원들은 수차례 검찰의 압수수색을 받은 사례가 있다. 실제 2020년 의료계 총파업 당시 대한병원의사협의회 비상대책위원회는 정부의 PA 활용 방침에 “합의의 진정성은커녕 의사 죽이기 악법만 발의하는 여당과 의료 공백 사태를 악용해 불법 PA 의료행위를 합법화하려는 정부의 행태를 규탄한다”며 강하게 반발했다. 전공의 등 의사단체 상당수가 반대하는 사안인 만큼 임시 허용은 몰라도 PA 합법화로 이어지기란 쉽지 않을 것이란 게 의료계 안팎의 시각이다.
간호협은 이날 입장문에서 “무면허 의료행위지시에 대한 보호 및 처벌에 대한 어떠한 약속도 없이 투입하겠다는 PA간호사를 활용하겠다는 정부 방침에 동의할 수 없다”며 “2020년 전공의 파업에 따른 의료공백 상황처럼 정부가 시키는 대로 불법 하에 간호사가 투입되어 의료공백을 메꾸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정부가 먼저 간호사 업무 범위 명확화 및 법적 보장과 안전망 구축을 약속하고 반드시 이를 법 보호체계에 명시화해야 모든 간호사는 의료공백 상황에서 업무를 수행할 수 있을 것”이라고도 덧붙였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