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포스트]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국회의원 세비를 국민의 중위소득 수준으로 낮추자고 제안하면서 국회의원의 높은 연봉과 특권이 다시 조명되고 있다.
한 위원장의 이번 제안이 인기영합적 발언이라는 비판적 시각을 딛고 공감대를 넓혀 올해 총선 판세에 영향을 주는 변수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2일 정치권에 따르면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쏘아올린 ‘국회의원 세비(歲費) 감축’을 두고 찬반에 신중론까지 여러 의견이 뒤엉키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한 위원장은 이날 서울 여의도 중앙당사 출근길에서 기자들과 만나 ‘국회의원 세비를 국민 중위소득 수준으로 줄이자는 자신의 제안과 관련해 “중위소득 세비로 국회의원 일 못하겠다는 분은 당초 여기(정치권에) 오시면 안 되는 분들”이라며 “국회의원은 대단히 중요한 영예로운 직업이고 국민을 대표하는 사람들이다”고 말했다.
한 위원장이 제시한 중위소득 수준은 지난해 기준의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4인 가구 기준으로 월 540만 원 정도에 해당한다. 이는 현재 약 1300만 원인 국회의원 월 세비를 40% 수준으로 감축하자는 것으로 볼 수 있다. 1인 가구 기준 중위소득은 222만 원으로 논의에 따라서는 약 17% 수준까지 줄이자는 뜻으로도 읽힐 수 있다.
이런 한 위원장의 제안에 대해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이들도 나온다.
윤영덕 민주당 의원(원내대변인)은 1일 최고위원회에서 “제안만 하지 말고 구체적 안을 가지고 와야 여야 협의를 해볼 수 있을 것”이라며 한동훈 위원장을 향해 “여의도화 되신 건가”라고 비꼬았다.
정치 구조와 법적 문제 등에 대한 깊은 고려 없이 인기 영합적 발언으로 화제성만 부각하는 게 아니냐는 비판으로 풀이된다.
한 위원장의 제안을 놓고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많다. 권영세 국민의힘 의원은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한 의원장의 발언을 놓고 “우리만 아니라 야당 동의가 필요하다”며 “아직은 중립적”라고 말했다.
반면 한 위원장의 제안에 호의적 태도를 보이는 인사들도 다수 있다.
안철수 국민의힘 의원은 기자들에게 “국민 중위소득 정도로 하고 물가에 연동을 하게 되면 그걸 의원들이 체감할 수 있지 않을까. 전적으로 찬성이다”고 말했다.
국회의원 세비 감축 주장은 과거에도 여러 차례 있었다.
인요한 전 국민의힘 혁신위원장은 지난해 11월3일 내놓은 혁신안 가운데 국회의원 세비 삭감 및 구속시 세비 박탈’본회의 불출석시 세비 삭감을 제시한 바 있다.
이탄희 민주당 의원 역시 지난해 3월 선거제 개편을 논의하던 당시 페이스북에 “세비 절반 감축을 먼저 약속하고 국회의원 정수 토론을 하자”며 “국회의원 세비를 절반으로 줄여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과거 선거에서도 여러 정당이 세비 감축을 공론화했는데 막상 현실화한 사례는 없다.
가깝게는 2020년 21대 총선에서 김형오 미래통합당(국민의힘 전신) 공천관리위원장이 공천을 받는 총선 후보들에게 의원이 되면 세비 삭감과 보좌진 수 감축 등의 내용을 담은 서약서를 받았으나 실현되지 않았다.
2005년에는 국민의힘 전신인 한나라당과 민주노동당이 다음해 예산안 중 세비 동결과 해외 출장비 감축 등 불요불급한 국회분야 예산을 줄이기 위한 방안을 잇달아 제시했으나 성사되지 못했다.
국회의원의 세비가 줄어들었던 건 1998년과 1999년 IMF 외환위기 당시 두 차례 밖에 없다. 그러나 바로 다음해 큰 폭의 인상으로 원상복귀됐다.
장기표 특권폐지당(가칭) 창립준비위원회 상임 대표에 따르면 현재 국회의원은 연 1억 5천만 원의 세비, 불체포’면책 특권, 9명이나 되는 대규모 보좌진 등 공개된 것 외에 숨어있는 특권까지 모두 찾아내 합하면 180여 가지나 된다.
정치 혐오와 회의론이 널리 퍼져 있는 데다 국회의원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도 높아 세비 감축에 동의하는 여론이 상당한 현실이다.
조원씨앤아이의 지난해 3월 여론조사를 보면 ‘의원 정수 및 세비’에 대한 축소’확대 여부를 묻는 질문에 ‘의원 수와 세비를 모두 줄여야 한다'(66.6%) ‘의원 수는 늘리고 세비는 줄여야 한다'(18.8%) 등의 응답이 나왔다. 합산하면 ‘의원 세비를 줄여야 한다’는 의견은 85.4%에 달했다.
이런 상황에서 한 위원장의 주장에 동조하는 의견이 늘어나면 이번 총선에서 득표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시각이 많다.
박용찬 국민의힘 영등포을 당협위원장은 1일 YTN 라디오 신율의 뉴스정면승부에 출연해 한 위원장의 제안을 놓고 “아젠다 세팅은 상당히 성공했다”며 “현장에서 유권자분들을 만나봤더니 굉장히 반응들이 괜찮다”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국회의원 세비를 비롯해 고위공직자들의 보수를 줄이면 안된다는 주장도 여전히 만만치 않다. 그 근거 논리로는 ‘궁핍한 권력은 부패한다’는 점이 제시된다.
다시 말해 국회의원이 돈이 궁하면 자신의 권한을 악용해 이권과 결탁하거나 불법 후원금 모집 유혹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논리에 따르는 세비 구조를 가진 국가로는 스웨덴이 꼽힌다. 스웨덴의 2021년 기준 의원 보수는 월 6만 9900 스웨덴 크로나(약 950만 원)이다. 이는 스웨덴 근로자 평균보다 2배 정도 높다. 한국은 국회의원 세비가 근로자 평균임금보다 약 2.4배 많은 것으로 추산된다.
한국과 스웨덴의 의원 보수는 비슷한 수준이나 두 나라의 ‘부패인식지수(Corruption Perceptions Index)’는 크게 차이가 난다. 국제투명성기구가 발표하는 부패인식지수에서 한국은 63점으로 세계 32위 수준이다. 반면 스웨덴은 83점으로 세계 5위 수준이다.
부패인식지수는 공공부문의 부패에 대한 전문가와 기업인의 인식을 보여준다. 100점 만점에 70점을 넘어야 ‘사회가 전반적으로 투명한 상태’로 평가되고 50~69점대는 ‘절대 부패로부터 벗어난 정도’로 해석된다.
한국 국회의원의 세비가 스웨덴보다 더 높음에도 불구하고 부패인식지수가 한참 낮은데 현재보다 낮아지면 부패의 위험성이 더 커진다고도 볼 수 있는 셈이다.
여러 연구에서 이런 견해에 설득력이 있다는 점이 다수 나타나고 있다.
톰-레엘 헤게달(Tom-Reiel Heggedal) 노르웨이 비즈니스스쿨 경제학과 교수를 비롯한 3인의 논문 ‘정치인에게 급여를 많이 주면 부패를 줄일 수 있을까? 임금과 불확실성이 선거경쟁에 미치는 영향(Can paying politicians well reduce corruption? The effects of wages and uncertainty on electoral competition)’에서도 ‘높은 급여가 부패의 위험을 크게 줄여준다(We find that higher wages significantly reduce corruption in the experiments)’고 결론 내리고 있다.
한 위원장은 이번 국회의원 세비 삭감 제안 이전에도 국회의원 정수 50명 삭감, 불체포특권 포기 등 국민들의 정치 불신 분위기에 부합하는 공약을 내놓기도 했다. 이에 야당에서는 한 위원장의 정치개혁 공약에 대해 ‘포퓰리즘’이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박용진 민주당 의원은 16일 페이스북에 한 위원장의 정치개혁 공약을 놓고 “정치 혐오에 기생하고 정치의 자정능력을 없애는 개악안”이라고 비판했다.
이같은 비판에 한 위원장은 지난달 29일 당 비대위회의에서 “민주당은 정치개혁과 국회의원 특권 내려놓기가 포퓰리즘이라고 이야기한다”며 “이게 포퓰리즘이라면 우리는 기꺼이 포퓰리스트가 되겠다”고 맞받았다. 이준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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