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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녹취 파일 원하면 각서”…’홍콩 ELS’ 대응 도 넘는 은행들

데일리안 조회수  

책임 회피성 대응에 소비자 울분

직원 희망퇴직에 연락 끊기기도

상반기 6조원대 원금 손실 우려

서울 여의도 금융감독원 앞에서 홍콩 항셍중국기업지수 주가연계증권 피해자들이 집회를 열고 있다. ⓒ연합뉴스
서울 여의도 금융감독원 앞에서 홍콩 항셍중국기업지수 주가연계증권 피해자들이 집회를 열고 있다. ⓒ연합뉴스

홍콩 항셍중국기업지수(H지수) 주가연계증권(ELS)의 만기를 일주일 앞두고 하루하루 마음을 졸이고 있던 한 고객은 은행 지점을 찾았다가 황당한 일을 당했다. 가입 당시 녹취 파일을 달라고 하자, 책임 회피를 위한 은행 측의 각서 작성을 강요받은 것이다.

또 다른 고객은 자신에게 상품을 가입하게 했던 은행원이 최근 퇴사 후 해외로 떠나버렸다는 소식에 발만 동동 구르고 있다. 이리저리 책임을 면하려는 새로운 담당자의 태도에 속은 더욱 타들어가고 있다.

홍콩H지수 ELS에서 올해 상반기 대규모 원금 손실이 예상되는 가운데 이를 판매한 은행들의 고객 대응이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금융감독원의 조사가 진행되고 불완전판매 여부가 핵심 쟁점이 되자 압박감을 느낀 일부 은행 직원들이 책임 회피 행동을 보이면서다.

은행들이 현재 홍콩H지수 ELS의 신규 판매를 중단한 상황에서 기존 가입자에 대한 관리가 엉망이란 볼멘소리가 잇따르고 있다.

24일 서울시 구로구에 거주하는 40대 전업주부 임모씨의 제보에 따르면 그는 자신이 가입한 홍콩H지수 ELS의 불완전판매를 입증하기 위해 판매 과정이 담긴 녹취 파일을 은행 측에 요구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해왔다.

임씨의 요구가 거듭되자 은행 측은 ‘금융거래 정보제공 요구(동의)서’와 별도로 자필 서명이 포함된 일종의 ‘각서’를 작성하도록 했다. 각서에는 ‘녹취 파일의 유출 및 가공에 따른 민·형사상 책임을 귀행에 묻지 않겠다’란 내용이 담겼다. 불법 소지가 다분한 요구를 강제한 셈이다.

임씨는 “처음에는 녹취 파일을 확인하고 싶으면 은행에 와서 직원과 같이 듣는 것만 가능하다고 설명했다”며 “다른 은행은 녹취 파일을 제공하고 있다고 따지니까 그제서야 내부규정이라면서 이면지에 불러주는 말을 받아쓰게 했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이어 “이 은행의 다른 지점에서도 이 같은 요구를 많이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제가) 사람들에게 불법이라고 알려주면서 (각서를) 다시 돌려받은 사람들도 있다”고 말했다.

한 법무법인 변호사는 “금융소비자보호법에서 규정한 녹취 의무와 이에 따른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각서를 쓰게 한 것이라면 그 자체로 불법의 소지가 있어 보인다”며 “녹취라는 게 불완전판매 행위를 밝히기 위해 하는 건데, 그걸 외부로 공개한다거나 추후 다투기 위해 요구하는 것을 가지고 책임 소재를 경감하기 위해 각서를 작성하게 했다면 입법 취지에 반하는 행동”이라고 지적했다.

임씨는 가입 과정부터 문제 투성이였다고 토로했다. 은행원은 ‘공격투자형’ 투자 성향 결과를 얻어내기 위해 투자자 정보 확인서를 거짓으로 작성했고 임씨에게 서명만 하도록 했다는 주장이다.

당시 은행원은 홍콩H지수 ELS에 대해 “주식처럼 손실을 보는 상품이 아니다”라며 가입을 적극 권유했다. 이 은행을 30년째 이용하면서 VIP 고객인 임씨는 은행 직원의 말을 신뢰했다.


이에 따라 임씨는 홍콩H지수가 고점이었던 2021년 2월 이 상품에 3500만원을 넣었는데, 현재 지수가 반토막 나면서 사실상 원금 손실이 불가피한 상황에 처했다.

금융거래 정보제공 요구(동의)서와 은행이 별도로 요구한 자필 각서. ⓒ제보자 제공
금융거래 정보제공 요구(동의)서와 은행이 별도로 요구한 자필 각서. ⓒ제보자 제공

홍콩H지수 ELS에 1억7000만원을 넣은 60대 김모씨는 현재 가입을 권유했던 은행 직원이 희망퇴직을 진행하면서 연락이 끊긴 상태다. 다른 은행 직원이 김씨에게 새로 배정됐지만, 본인이 판매한 상품이 아니라며 소극적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는 게 김씨의 주장이다. 김씨는 은행 두 곳에 각각 1억원, 7000만원씩 가입했고 오는 3·6월 만기가 도래한다.

김씨는 “PB팀장이 희망퇴직을 신청해 거액을 받고 신랑과 장기 해외여행을 떠났다”며 “그만둔 지 며칠 지나지 않았는데 해외여행 가버리면서 연락이 안 되고, 바뀐 PB팀장은 본인이 가입시킨 것 아니라며 일언반구도 없다”고 하소연했다.

이런 와중 홍콩H지수 ELS 상품의 만기일이 점점 다가오면서 소비자들의 원금 손실 확정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 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 등 5대 은행이 판매한 홍콩H지수 ELS에서 올해 들어 지난 19일까지만 2296억원의 원금 손실이 발생했다. 이 기간 만기 도래 원금 약 4353억원 중 2057억원만 상환됐으며, 전체 손실액은 2296억원(손실률 52.8%)에 달했다.

앞으로도 손실 규모는 더욱 확대될 가능성이 크다. ELS 특성상 기초자산 가격 변동성이 커지면 원금 손실 위험도 그만큼 높아지는데, 중국 경기 부진이 지속돼 홍콩H지수가 좀처럼 반등하지 못하고 있는 탓이다.

홍콩H지수는 2021년 2월까지만 해도 1만2000선을 나타냈다. 하지만 같은 해 말 8000선까지 밀린 이후 하락세를 지속하며 지난해 10월에는 5000선이 붕괴되기도 했다. 현재도 5000선을 나타내고 있는데, 이 추세가 지속되면 올 상반기에만 5대 은행에서 6조원대 원금 손실이 발생할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데일리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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