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신의 나라’, 한국은 ‘반도체의 나라’
1980년대 일본이 잘나갈 때 모 총리가 일본은 ‘신(神)의 나라’라고 떠들었지만 일본이 제조업에서 경쟁력을 잃자 조용해졌다. 한국은 지금 ‘반도체의 나라’다. 반도체가 한국의 수출을, 경제성장을 좌우하고 있다. 2023년 무역 성적표가 나오자 한국은 무역적자, 특히 대중 무역적자가 났다고 야단법석이었지만 그 배경에는 모두 반도체가 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다 잘할 수는 없다. 선수는 하나만 잘하면 되는 것이고 싸움의 고수는 한 놈만 팬다. 그 하나가 반도체다.
한국 무역적자의 주범이 반도체로 몰렸다. 한국의 수출이 총수출의 16%를 차지해 반도체 의존도가 크고 반도체에서는 메모리 의존도가 큰 것이 문제라고 한다. 2023년 한국 15대 수출 품목의 수출 감소분이 479억 달러인데 이 중 반도체가 306억 달러로 63%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2023년에 100억 달러 무역적자를 냈지만 986억 달러어치를 수출한 반도체 가격이 11%만 올라가면 한국의 무역적자는 바로 흑자로 돌아선다. 반도체 수출의 55-60%가 중국인데 2023년 대중 무역적자가 180억 달러지만 반도체 가격이 33%만 올라가면 바로 180억 달러 늘어나 대중 무역도 흑자전환할 수 있다
미래를 내다보는 시력(視力)이 실력이다
반도체, AI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지금 한국의 임계철선은 38선이 아니라 반도체 팹(FAB)이 있는 이천-기흥-화성-평택 라인이다. 역대 미국 대통령의 한국 방문지 1순위는 휴전선이었다. 그런데 바이든 대통령은 역대 미국 대통령과 달리 휴전선을 가는 대신 삼성반도체 팹으로 직행했다.
40년 전 할아버지의 반도체에 대한 통찰력이 손자를 웃게 하고 미국에 대해서도 한국을 당당하게 만들었다. 예전의 이천 쌀밥집과 수원 갈비집의 변신이 한국을 살린 것이다. 지금 한국은 세계 DRAM 반도체 시장의 74%를 장악하고 있다. 이는 세계 IT 시장에서 70%대 점유율을 가진 미국의 OS 시스템에서 마이크로소프트나 CPU의 인텔 정도나 가지고 있는 점유율이다.
위기는 기존 질서가 사라졌지만 새로운 질서가 나타나지 않을 때 생긴다. 모바일에서 AI로 전환, 화석연료에서 클린에너지로 전환, 미국의 민주당 바이든에서 공화당 트럼프로 정권 전환이 그것이다. 그래서 2024년은 개와 늑대의 시간이다. 어둠이 지는데 먼 곳에서 다가오는 그림자가 인간의 친구인 개인지, 적인 늑대인지 불분명하다.
AI가 대세로 굳어진 시대에 한국은 반도체에서 1.5장의 카드를 가지고 있다. AI는 엔비디아가 대박을 냈지만 문제는 5㎚ 이하 공정기술이 필요한 첨단 GPU 파운드리와 첨단 광대역메모리(HBM)이다. 한국은 HBM에서는 90% 점유율로 세계 1위지만 파운드리는 대만 다음 가는 2등이라서 카드는 2장이 아닌 1.5장이다.
미국 서부에서 금광이 발견되었을 때 정작 최후까지 살아남아 떼돈 번 사람은 청바지 장사다. 누가 노다지를 캐든 청바지 직업복은 필요했다. AI 시대에 미·중의 빅데이터, AI 응용시스템과 비교하면 한국의 능력은 역부족이다. 하지만 AI의 필수 인프라인 하드웨어에서 한국은 HBM에선 독보적이고 파운드리에서만 1등 하면 AI 시대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첨단 반도체 파운드리에서 삼성이 세계 2위라고 하지만 대만 TSMC의 파운드리는 매출이 삼성의 4배나 되는 1등이다. 매출로 뒷받침되는 것이 진짜 기술이다. 삼성이 GAA(Gate-all-Around) 공정 기술에서 대만을 따라잡았다고 하지만 고객의 선택이 중요하다. 대만 TSMC는 이미 5㎚, 3㎚의 매출 비중이 39%나 된다.
AI 전쟁 시대, 반도체는 전략물자이고 국가대항전이다
AI 전쟁 시대에 반도체는 핵심 전략물자이고 반도체 산업은 재벌의 수익사업이 아닌 국가안보산업이다. 미국이 외국 반도체 기업까지 포함해 520억 달러에 달하는 천문학적 보조금을 퍼주는 것은 이유 있다. 미국은 반도체 보조금이 아니라 첨단 기술 전쟁에 필요한 최고의 무기 확보를 위한 국방비로 보는 것이다. AI 시대에 엔비디아는 AI 전쟁터의 최고 무기상인이다. 그 천하의 무기상도 한국의 HBM이 없으면 AI 칩을 공급하지 못한다. 한국은 메모리반도체 비중이 높다고 자기 비하할 게 아니라 미·중이 갖지 못한 전략 무기를 활용해 돈을 벌고 외교적 입지도 강화해야 한다.
미국 바이든 대통령이 한국 대통령 취임 후 역사상 처음으로 먼저 한국을 방문하고, 천문학적 보조금을 주면서 한국 반도체 기업 공장을 유치하는 것은 AI 전쟁 시대에 전쟁무기인 첨단 반도체의 생산 내재화 때문이다. 중국이 핵심 이익이라는 대만 문제를 언급해도, 한·미 동맹을 강화하고 한국이 중국의 공급망 봉쇄동맹인 IPEF(인도태평양경제프레임워크)에 1번으로 참여해도 보복하지 못하는 것은 오직 하나, 반도체 기술 때문이다. 지금 한국이 미·중 관계에서 당당할 수 있는 최종병기는 활이 아닌 반도체다. 이젠 한국의 미·중 관계 수명은 반도체 수명과 같이 간다. 반도체 기술에서 미국과 중국에 따라 잡히면 한국은 한순간에 개털된다.
지난 30년간 중국과의 경쟁에서 한국이 중국보다 잘하는 것은 이젠 축구와 반도체밖에는 없다. 이미 미·중이 반도체 전쟁을 하는 상황에서 없던 반도체 경쟁력을 새로 만드는 것은 어렵다. 있는 경쟁력을 유지하고 확장하는 것이 중요하다. 지금 반도체는 민영기업 간 경쟁이 아니라 국가대항전이다. 5㎚ 공장 하나 짓는 데 250억 달러가 들어가는 반도체산업에서 자금이 반도체산업의 총알이다. 총알이 없으면 전쟁터에 참가해도 의미 없다. 각국의 반도체 지원책을 보면 조세 감면은 당근이고 이젠 미·중·유럽의 반도체 보조금은 40조~60조원이 기본이다.
남들과 같이 해서 한국이 남을 이기기는 쉽지 않다. 달리는 말에 먹이를 주는 것이 쉽지, 일본처럼 이미 엎드린 말을 깨워서 달리게 하는 것은 늦다. 한국은 세계 1·2위인 메모리와 반도체 파운드리산업을 재벌의 수익사업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국가안보산업, 그리고 미·중 외교의 최종 무기라고 인식을 전환할 필요가 있다.
미·중의 기술 전쟁은 미국 대통령이 누가 되든 간에 더 가열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미국은 반도체 기술은 있지만 공장이 없고, 중국은 공장은 있지만 기술이 없다. 우리는 천행으로 미·중의 반도체 전쟁에서 어부지리할 수 있는 패를 잡았으면 그 패를 이용해 이기는 게임을 해야 한다. 한국은 반도체 지원에 있어 자금, 인재, 정책에 파격이 있어야 한다. 사회적으로 필요는 하지만 의대 정원 확대를 급속도로 추진하면 의도치 않은 반도체 엔지니어의 치명적 부족을 가져올 수도 있어 신중함도 필요해 보인다
전병서 필자 주요 이력
△칭화대 석사·푸단대 박사 △대우경제연구소 수석연구위원 △반도체IT 애널리스트 17년 △경희대 경영대학원 객원교수 △중국경제금융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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