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초 일본 하네다(羽田)공항에서 “‘90초 룰(rule)’이 생명을 구했다”고 온 세계 언론이 이구동성으로 보도했다. 이런 기적 같은 일은 결국 신속한 대피를 위한 ‘룰’과 그 ‘룰’을 실행해낸 승무원과 승객으로 인해 가능했다.
‘90초 룰’은 항공기 사고에 대비해 미국 연방항공국(FAA, Federal Aviation Administration)이 제시한 항공기 제작 기준으로 모든 상업용 항공기에 적용된다. 그 인증을 통과하기 위한 테스트는 엄격하다. ‘비상구의 50%만 사용 가능하고, 바닥에 있는 최소 조명 속에서, 수하물이나 담요 등이 통로에 떨어져 있으며, 연령 별로 고르게 승객이 타고 만석인 상태’로 준비된 세팅에서 승무원과 승객으로 참여한 사람들이 실제로 90초 만에 탈출하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비행기 사고를 대비한 항공기 제작기준과 인증을 보니 나는 자연스럽게 도시 속 건물이나 장소, 특히 사람들이 밤낮으로 사는 아파트의 화재 시 대피 매뉴얼은 어떤가 관심이 간다.
얼마 전(성탄절 새벽) 아파트에 화재가 발생해(23층 아파트 3층) 30대 가장이 딸을 안고 4층에서 뛰어내려 딸을 살리고 자신은 결국 세상을 떠난 일이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애절한 아빠의 딸 사랑만큼 주민들의 아파트 화재 대응요령에 대해서도 좀 더 깊이 보도되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국민재난안전포털(https://www.safekorea.go.kr/idsiSFK/neo/main/main.html, 행정안전부)에는 화재 시 국민행동요령이 잘 정리돼 있다. 이에 따르면 화재경보를 듣거나 화재를 본 경우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고 자신의 대피방법 등은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해야 한다. 실외로 대피가 어려운 경우에는 ’경량 칸막이(아파트의 발코니 등에서 옆집과의 경계 칸막이)를 부수거나 하향식 피난구(아파트의 발코니에서 위나 아랫집으로 피난할 수 있게 설치한 구멍)를 통해 피신하거나 완강기를 이용해 창문으로 나가도록 한다. 이런 대피방식이 없는 경우 집 안의 대피공간으로 대피하였다가 불이 꺼진 후 나오도록 안내하고 있다. ‘90초 룰’이 ‘시간의 절감’에 초점을 두고 있는 것에 비해 건물에서는 ‘공간과 시설의 마련’에 룰의 방점이 찍혀있다. 시간에 대한 것은 ‘5분 이내 현장에 출동’을 목표로 하는 소방관서에 넘겨져 있다.
국민행동요령을 읽고 나니 과연 나는 고층 아파트에 불이 났을 때 스스로 잘 피난할 수 있을까 은근히 걱정이 된다. 가족도 함께 있다면 더욱 큰일이다. 옛날식 아파트라서 발코니가 있는 경우 옆집과의 경계에 있는 칸막이가 경량인지 아닌지 체크해본 적이 없다. 내 집 발코니 바닥이나 천장에 윗집이나 아랫집으로 통하는 비상 탈출구가 있는지 기억에 없다. 완강기가 있다고 해도 어떻게 이용하는지 모르며 혹 이용한다고 해도 그 높은 아파트에서 줄에 매달려 창밖으로 나와 아래로 내려간다니 벌써부터 앞이 캄캄하다.
지난 10여 년간에 지은 아파트는 대부분(타워형 또는 계단실형 아파트) 집 안의 옛 발코니(발코니 확장으로 이제 발코니는 거의 설치되지 않는다) 위치쯤에 대피공간(2㎡, 1m x 2m)을 설치하고 있다(건축법시행령 46조 4항, 2013년 개정). 방화구획이 되고 방화문이 설치되지만 좁은 공간에서 문 꼭 닫고 불안에 떨며 구조될 때까지 견디기도 심리적으로 엄청난 압박일 것이다. 휴대폰이 연결되어 외부로부터 조언과 지시가 가능하다고 해도 무섭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두 가지 궁금증과 과제가 떠오른다. 첫째는 생명에 이처럼 중요한 화재 시 행동요령을 모든 사람들이 잘 알고 있는 것일까? 둘째는 사람들은 자기가 사는 아파트 집에 어떤 피난방식과 시설이 있는지 알고 있을까? 첫 번째가 지식에 관한 것이라면 두 번째는 그의 현장 실행에 관한 것이다. 건설시기마다, 건설업체마다, 평형마다 다른 다양한 아파트의 평면 형태나 대피방식으로 인해 글로 된 일반적 대피요령 숙지로는 안전을 담보하기 어렵다. 시간을 내어 가족이 함께 둘째 과제를 한번 실습하는 것이 꼭 필요하다. 재난 상황은 시간을 다투는 일이기 때문이다.
비행기 타면 보여주는 비상시 대피요령과 데모(demonstration) 같은 것이 집에서 TV나 휴대폰을 켜면 각자의 집에 맞게 나오면 좋겠다. 호텔이나 영화관에 갔을 때 그런 것을 보여주는 것이 갑자기 요식행위가 아니게 느껴진다. ‘비상시 아파트 사용설명서’가 각 집에 맞게 작성되어 부동산 중개인이 입주할 때 현장에서 설명과 함께 일부 실연하는 것도 서비스에 포함되면 좋겠다.
비행기나 고층아파트나 재난이 발생하면 사람들은 비슷한 상황에 처한다. 아파트에서는 안내원이 없는 것이 큰 차이다. 결국 주민 스스로 판단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사전 대피요령 숙지와 실제 연습만큼 도움이 되는 것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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