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일(현지시간)에서 12일 미국 네바다주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세계 최대 기술 전시회 CES 2024가 △소프트웨어중심자동차(SDV) △생성 인공지능(AI) △로봇 △푸드테크 △헬스케어 △스마트홈 △지속가능성 △메타버스 등 올해 여덟 가지 핵심 기술 화두며 막을 내렸다.
전 세계 주요 기업들이 SDV와 생성 AI를 미래 먹거리 확보를 위한 핵심 화두로 삼은 가운데 로봇과 푸드테크도 급성장할 미래 산업으로 많은 기업과 관람객에게 주목을 받았다. 헬스케어와 스마트홈 분야에도 많은 기업이 신기술을 들고 참여했지만 혁신적이라고 평가할 만큼 놀라운 서비스는 지난해보다 눈에 띄지 않았다. 지속가능성과 메타버스 산업은 지난해에 비해 확연히 침체된 것이 느껴졌다. 한때 세상을 바꿀 기술이라고 평가받던 블록체인은 더는 주역이 아니었다.
올해 CES 2024의 핵심 화두는 누가 뭐래도 SDV다. 현대·기아자동차와 포티투닷을 필두로 인텔 등 미국 반도체 기업과 혼다·소니 등 일본 기업까지 모두 “자동차의 미래는 SDV”라고 입을 모았다. 현대모비스의 투자를 받은 국내 AI 스타트업 ‘스트라드비전’과 ‘모라이’도 자사 SDV 기술력을 전 세계에 알렸다.
SDV란 스마트폰처럼 소프트웨어가 우선시되는 자동차를 말한다. 과거 자동차는 하드웨어가 주가 되고 소프트웨어는 부차적인 요소였다. 하지만 테슬라를 필두로 제한적이지만 자율주행차가 속속 등장하면서 소프트웨어 업데이트로 성능이 강화되는 SDV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하드웨어 기술이 상향 평준화되면서 차별화된 소프트웨어 기술력이 글로벌 시장에서 앞서갈 수 있는 핵심 경쟁력이 됐다.
CES 2024에 앞서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은 신년사를 통해 “2025년까지 모든 차종을 SDV로 전환하겠다”며 “미래 차에는 지금보다 10배 이상 많은 2000~3000개의 반도체가 들어갈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정 회장은 SDV 경쟁력 강화를 위해 연구·개발(R&D)을 비롯한 회사 전반의 시스템을 소프트웨어 중심으로 전환하고, 독자적인 자동차 운영체제(OS)를 확보하겠다는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정 회장 구상에 맞춰 CES 2024에서 현대·기아차와 포티투닷의 신기술·서비스 발표는 SDV에 집중됐다.
PC·서버용 반도체 강자인 인텔도 자회사 모빌아이와 함께 SDV를 위한 반도체 생산·공급 확대에 주력하겠다고 강조했다. 차 하드웨어를 맡는 혼다와 소프트웨어를 맡는 소니가 합작해 만든 소니혼다모빌리티는 CES 2024에서 SDV 전환의 핵심 역할을 할 전기차 2024년형 ‘아필라’를 시연하기도 했다. 2024년형 아필라는 테슬라처럼 차량제어와 카 인포테인먼트 시스템이 하나로 통합된 것이 특징이다.
전문가들은 SDV가 국내 기업들이 하드웨어 기술을 빠르게 강화하고 있는 중국 전기차 업체들과 격차를 벌릴 수 있는 핵심 경쟁력이라고 강조한다. 실제로 CES 2024에선 중국 전기차 기업 10여곳 참여해 올해 주력 모델을 시연했다.
생성 AI의 경우 대기업보다는 마음AI 등 스타트업들이 라마·스테이블 디퓨전 등 시장의 다양한 오픈소스(공개) 파운데이션 모델을 활용한 응용 서비스를 선보이며 AI 생태계가 급성장하고 있음을 알렸다.
생성 AI 업계를 이끄는 마이크로소프트(오픈AI)·구글·메타 등 빅테크는 CES 2024에 부스를 차리기보다는 로레알·이마트 등 생성 AI 전환(AI 트랜스포메이션)을 하려는 기업들의 혁신 파트너 역할을 자청했다. 사티아 나델라 마이크로소프트 최고경영자(CEO)는 월마트 기조연설에 깜짝 등판해 더그 맥밀런 월마트 CEO와 생성 AI를 활용한 유통 혁신에 관한 대담을 나눴다. 메타는 라마와 관련한 비공개 기업 간 거래(B2B) 부스를 운영했다. 구글은 라스베이거스컨벤션센터(LVCC) 센트럴홀 앞에 대규모 야외 부스를 꾸렸지만, 안드로이드와 스마트홈에만 집중하고 생성 AI 관련 발표는 하지 않았다.
대신 올해 CES 2024에선 ‘온 디바이스 AI’가 가전·반도체 기업을 중심으로 화제였다. 인터넷과 대규모 데이터센터 도움 없이 나만의 AI 비서를 제공하는 온 디바이스 AI는 빅테크에 생성 AI 기술 주도권을 뺏긴 삼성전자·인텔·퀄컴 등 가전·반도체 기업이 시장에서 고유의 영역을 확보하려는 행보로 풀이된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 CES 행사에서도 수 많은 로봇들이 등장해 사람과 로봇이 함께 생활하는 시대가 열렸음을 알렸다. 국내 기업의 경우 삼성전자와 LG전자가 각각 가정용 로봇 ‘볼리’와 가사 도우미 ‘스마트홈 AI 에이전트’를 선보였다.
중국 나인봇의 자회사 세그웨이는 잔디깎이 로봇 ‘내비모우’를 공개하며 이목을 끌었다. 인도의 로봇 기업 오그멘 로보틱스는 애완견을 위한 로봇 ‘오로’를 공개하며 사람뿐 아니라 반려동물도 로봇 산업의 고객이 될 수 있음을 알렸다.
푸드테크는 올해부터 주목도가 급격히 커진 산업이다. CES 2024 현장에서 가장 주목을 받은 푸드테크 기업은 한국의 누비랩과 미드바르였다. 누비랩은 AI 기술로 음식의 영양소를 파악해서 최적의 식단을 짤 수 있는 AI 푸드 스캐너 서비스를 선보였고, 미드바르는 공기 중 수분을 물로 바꿔 작물에 제공함으로써 스마트팜 수도시설을 최소화하는 기술로 CES 최고혁신상을 받았다. 잉크포디도 개인 맞춤형 알약을 만들 수 있는 4차원 푸드 프린팅 시스템을 선보여 주목받았다.
한국뿐 아니라 미국·일본에서도 다양한 아이디어 기술·서비스가 쏟아졌다. 전문가들은 “푸드테크란 사람의 경험에 기대던 기존 음식 산업을 AI 등 미래 기술을 활용해 혁신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헬스케어와 스마트홈은 여전히 참여하는 기업은 많았지만 코로나19 이전에 유행하던 ‘시니어(노년층)’와 ‘무선’이라는 흐름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못했다. 참여 업체도 지난해와 비교해 절반 수준으로 줄었다. 한 IT 업계 전문가는 “올해 CES에 출품한 헬스케어와 스마트홈 기기는 ‘이용자가 이것을 왜 사야 하는지’ 당위성을 갖추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며 “신기하지만 그뿐”이라고 아쉬움을 표했다.
아마존은 AI 스피커 ‘에코’를 중심으로 하는 통합 헬스케어·스마트홈 부스를 꾸려 관람객을 맞이했다. 특히 지난해 9월 공개한 스마트 안경 ‘에코 프레임’을 크게 강조하며 안경이 스피커를 대신해 이용자와 스마트홈을 연결하는 새 허브가 될 수 있음을 시연했다. 하지만 에코 프레임 역시 CES 관람객을 대상으로 할인 판매 행사를 하는 등 구매 당위성을 주는 데 실패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2020년 들어 많은 이목이 집중된 지속가능성과 메타버스는 침체기에 접어들었다. 가장 큰 이유는 수익성 부재다. 지속가능성은 ‘탄소중립’과 ‘자원순환’이 양대 핵심 기술로 꼽히는데, 탄소중립만으로 수익을 내는 기업은 없고 자원순환으로 약간의 매출·영업이익을 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탄탄한 기존 비즈니스가 있는 기업이 환경·사회·투명경영(ESG) 차원에서 지속가능성 기술과 성과를 발표하는 경우는 많았지만, 발표의 주가 되지는 못했다.
한국·중국 기업을 중심으로 관심도가 커진 메타버스도 올해 참여 기업이 크게 줄었다. 롯데정보통신이 실제와 같은 3D 그래픽을 갖춘 ‘칼리버스’를 공개하며 업계 체면치레를 했다. 메타버스와 연계된 공간컴퓨팅의 경우 메타는 비공개 시연을 고집했고 애플은 CES에 참여하지 않고 별도로 공간컴퓨팅 기기 ‘비전 프로’의 출시일을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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