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일리임팩트 변윤재 기자]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새해 첫 현장경영으로 반도체를 택했다. 최 회장은 SK하이닉스의 연구개발(R&D)센터를 찾아 반도체 현안들을 직접 챙겼다. 이 자리에서 최 회장은 인공지능(AI) 메모리 분야 성장동력과 올해 경영방향을 점검하며 사업 경쟁력을 높일 수 있는 방안을 논의했다.
4일 SK그룹에 따르면 최 회장은 SK하이닉스 본사인 이천캠퍼스에서 곽노정 사장을 비롯한 주요 경영진으로부터 고대역폭메모리(HBM) 등 AI 메모리 기술에 대해 설명을 듣고 중장기 전략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그룹 관계자는 데일리임팩트에 “참석자들과 열띤 분위기 속에 경영시스템을 점검하고 내실 강화 방안들을 토론했다”고 전했다.
최 회장은 이 자리에서 민첩한 대응을 당부했다. 그는 “역사적으로 없었던 최근 시장 상황을 교훈 삼아 골이 깊어지고 주기는 짧아진 사이클의 속도 변화에 맞춰 경영계획을 짜고 비즈니스 방법을 찾아야 한다”면서 달라진 경영환경에 맞춰 발빠르게 대응해달라고 주문했다.
특히 최 회장은 반도체 사업이 거시 환경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만큼, 심도 깊은 분석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여러 관점에서 사이클과 비즈니스 예측 모델을 만들어 살펴야 한다”면서 “특정 제품군만 따지지 말고 매크로 상황을 파악해야 하고 마켓도 이제 월드마켓이 아니라 분화된 시장 관점에서 살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 같은 관점에서 최 회장은 AI 반도체 전략도 ‘고객 관점’에서 수립돼야 한다고 짚었다. 그는 “빅테크의 데이터센터 수요 등 고객 관점에서 투자와 경쟁상황을 이해하고 고민해야 한다”며 글로벌 시장의 이해관계자를 위한 토털 솔루션적 접근을 강조했다.
최 회장은 SK하이닉스에 각별한 관심을 드러내왔다. 지난해 9월 세계박람회 부산 유치전으로 대외활동이 많았던 때에도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를 방문, 공사 현황을 살폈다. 현재 부지 조성 작업이 진행 중인 용인 클러스터는 SK 반도체 사업을 비약적으로 성장시킬 전진기지다. SK하이닉스는 이 곳에 내년 3월 첫 번째 팹을 착공해 2027년 5월 준공할 계획이다. 해당 팹을 기반으로 AI 반도체 시대를 이끄는 선두기업으로 자리매김하겠다는 목표다.
이에 앞서 지난 2021년엔 코로나19에도 이천캠퍼스 M16 공장 준공식에 참석해 “어려운 시기에 내린 과감한 결단이 더 큰 미래를 꿈꿀 수 있게 해줬다. M16은 그동안 회사가 그려온 큰 계획의 완성이자 앞으로 용인 클러스터로 이어지는 출발점으로서 중요한 상징으로 남을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특히 당시 SK하이닉스는 성과급을 놓고 내부 반발이 거셌는데 최 회장은 ‘구성원들을 위해 써달라’며 자신의 연봉을 모두 반납해 화제가 됐다.
최 회장이 SK하이닉스를 이처럼 챙기는 이유는 그룹 내 위상과 무관치 않다. D램 시장 2인자에 올라선 SK하이닉스는 그룹의 현금창출원으로 꼽힌다. 그러나 지난해 미중 갈등과 같은 지정학적 변수 속에 반도체 업황 부진이 지속되면서 맥을 못췄다. 3분기 기준, SK하이닉스의 누적 매출은 21조4602억원에 그쳤다. 전년 동기 대비 무려 41.9% 빠졌다. 같은 기간 영업손실은 8조원을 넘어섰다.
실적은 나빴지만 SK하이닉스 분위기는 한껏 고양됐다. HBM3을 포함한 차세대 D램 판매가 호조했기 때문이다. D램 출하량은 전분기 대비 20% 증가했고, 평균판매가격(ASP)도 10% 상승하면서 D램 사업은 2개 분기 만에 적자에서 벗어났다.
여러 개의 D램을 수직으로 쌓아 올린 HBM은 대용량 데이터를 신속하게 처리할 수 있어, AI 서버에 그래픽처리장치(GPU)와 함께 필수적으로 탑재된다. 다만 안정적 성능이 뒷받침돼야 하는 까닭에 고객사의 요구를 구현할 수 있는 최적화 기술이 중요하다. SK하이닉스는 세계 최초로 HBM을 개발한 뒤 10년여 간 투자를 지속해왔다. 그 결과 GPU를 선점한 엔비디아의 파트너로 HBM 시장에서 입지를 굳힐 수 있었다. 엔비디아에 4세대 제품인 HBM3을 독점 공급한 데 이어 5세대인 HBM3E도 공급한다.
엔비디아의 낙점을 받을 정도로 성능 검증은 끝난 상태, 덕분에 올해 물량은 지난해 이미 완판됐고, 내년 양산분을 놓고 고객사들과 협의가 진행 중이다. 실제로도 SK하이닉스는 HBM 시장 점유율 50%를 차지하는 1위 업체다. HBM 덕분에 삼성전자에 밀려 만년 2위에 머물렀던 설움을 털어냈던 것이다.
하지만 SK하이닉스가 1위를 계속 수성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삼성전자가 맹추격에 나선 까닭이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10월 HBM3E인 샤인볼트 개발에 성공했다.
샤인볼트는 데이터 입출력 핀 1개당 최대 9.8Gbps의 고성능을 구현하는 5세대 HBM이다. 초당 최대 1.2TB 이상의 데이터를 처리할 수 있는데, 30GB 용량의 초고화질 영화 40편을 1초만에 전송 가능한 속도다.
삼성전자는 비전도성 접착 필름(NCF) 기술 최적화를 통해 칩 사이를 빈틈없이 채워 고단 적층을 구현했으며, 열전도를 극대화해 열 특성 또한 개선했다. 삼성전자는 메모리 전후 공정을 물론 위탁생산(파운드리)이 가능한 구조를 구축한 점을 앞세워 차세대 HBM D램과 최첨단 패키지, 파운드리까지 결합된 맞춤형 턴키 서비스도 제공, 고객사를 공략 중이다. 삼성전자도 엔비디아의 주요 공급사로 낙점받기 위해 공 들이고 있다. 이와 관련, 현재 성능 검증이 진행되고 있다. 게다가 D램 3강 중 하나인 마이크론도 HBM 시장에 뛰어들었다. 이에 전체 D램에서 HBM의 비중은 지난해의 2배(18%)로 늘어날 전망이다.
이에 SK하이닉스도 HBM 기술 경쟁력과 시장 지배력을 동시에 높이기 위해 사활을 건 모양새다. 지난해 사장급 조직인 AI 인프라를 신설했다. AI 인프라 아래 부문별로 흩어져 있던 HBM 관련 역량과 기능을 결집한 HBM 비즈니스가 신설되고, 기존 GSM(글로벌 세일즈 앤 마케팅) 조직이 함께 편제된다. 또 AI 앤 넥스트 조직도 신설된다. 차세대 HBM 등 AI 시대 기술 발전에 따라 파생되는 새로운 시장을 발굴, 개척하는 패스파인딩 업무를 주도한다. 해당 조직은 GSM를 총괄했던 김주선 사장이 직접 관리한다. HBM2에서 HBM3, HBM3E까지 제품 전환 속도가 매우 빠른 만큼, 시장에서 우위를 유지하기 위해 역량을 결집시킨 것이다.
최 회장도 AI 반도체를 챙기며 SK하이닉스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그는 지난 연말 미국 실리콘밸리에 위치한 SK하이닉스 미주법인과 가우스랩스를 방문해 반도체 현안을 점검했다. 다음주에는 미국으로 이동, CES 2024에서 글로벌 시장의 AI 트렌드도 살필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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