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포스트] “단임제 아래서는 연임이 없으니 임기 3년이 지나면 당정관계에 레임덕이 옵니다. 당정 분리를 하지 않더라도 이 점은 마찬가지입니다. 13대 대통령 이후 모든 대통령이 탈당을 해야 하는 사태는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임기 3년차의 저주’라고 해야 할 형편입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7년 4월29일 청와대 브리핑을 통해 공개한 개헌을 위한 연설문에 나오는 말이다. 노 전 대통령이 헌법 개정안 발의를 유보하면서 실제로 연설이 이뤄지지는 않았으나 ‘임기 3년차의 저주’라는 표현은 대통령 단임제의 한계를 꿰뚫어본 말로 지금도 자주 인용되고 있다.
2024년 집권 3년차를 맞는 윤석열 대통령이 ‘3년차 저주’로 일컬어지는 권력 누수(레임덕’Lame duck) 징크스를 회피할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1일 정치권에 따르면 윤 대통령은 2024년 집권 3년차를 맞아 이날 발표하는 신년사를 통해 민생 성과를 되짚고 3대 개혁 등 주요 국정과제 추진 의지를 재확인할 것으로 예상된다.
윤 대통령은 지난해 12월29일 용산 대통령실에서 진행한 종무식에서 “올해 고금리, 고물가 등으로 경제가 정말 어려웠다”면서도 “상식적인 정책을 펴나가면서 많은 도전 과제와 위기를 헤쳐 나갔다”고 한 해를 돌이켰다.
12월26일 정부세종청사에 주재한 2023년 마지막 국무회의에서는 연금’노동’교육 3대 개혁을 놓고 “우리나라의 성장잠재력을 높이기 위해 끝까지 흔들림 없이 추진해야 하는 과제들”이라며 임기 안으로 반드시 3대 개혁을 완수하겠단 뜻을 밝히기도 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올 한 해 3대 개혁 등 주요 국정과제를 힘있게 추진해 나가기 위해선 2024년 제22대 국회의원선거 승리가 다른 무엇보다 중요할 것으로 전망된다.
최근 윤 대통령은 ‘전문성’과 ‘비정치인’을 슬로건으로 삼아 제22대 국회의원 선거 대비와 국정 운영 추진력을 감안한 2기 내각 진용을 꾸려가고 있다.
추경호 전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원희룡 전 국토교통부 장관, 박진 외교부 장관, 이영 전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박민식 전 국가보훈부 장관 등 유력 정치인 출신 인사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1기 내각과 달리 2기 내각 인사는 비정치권 인물들을 중심으로 꾸려졌다.
윤 대통령은 2023년 마지막 업무일인 12월29일 최상목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송미령 농림축산식품부 장관, 강도형 해양수산부 장관, 오영주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김홍일 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에 대한 임명안을 재가하는 등 2기 내각 전열을 갖춰 신년을 시작했다.
최상목 경제부총리 겸 기재부 장관은 거시경제와 금융 분야 등에 모두 정통한 정통 경제관료 출신이다. 박상우 국토부 장관은 국토교통부의 전신이 된 여러 부처들에서 일했다. 강정애 보훈부 장관은 숙명여자대학교 총장을 지낸 학자였으며 오영주 중기부 장관은 외교부 제2차관까지 지낸 외교관이다.
윤 대통령은 대통령실도 개편했다. 김대기 전 비서실장이 물러나고 이관섭 비서실장이 대통령실 컨트롤타워에 올랐으며 성태윤 정책실장’장호진 안보실장을 임명해 3실장 체제를 갖췄다. 여기에 수석비서관까지 모두 비정치인 출신으로 교체하며 국정운영의 고삐를 조였다.
윤 대통령이 과감한 인적 쇄신을 단행했으나 실질적 국정 동력 확보 여부는 4월10일 치르는 제22대 국회의원 선거에 달렸다고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21대 국회에서 야당이 우세한 입법지형에 막혀 주요 정책을 추진하는데 어려움을 겪어 왔기 때문이다.
이번 총선에서도 만약 여당이 패배하게 된다면 윤 대통령의 집권 3년차 레임덕이 가속화될 것으로 전망된다. 총선 패배로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책임을 지는 상황을 맞으면 당은 미래 권력 준비에 들어갈 수밖에 없다. 비정치인 위주로 꾸려진 정부’대통령실과 관계가 벌어져 여권 균열을 야기할 수 있다.
반면 총선에서 승리하게 된다면 한 위원장을 중심으로 윤 대통령의 국민의힘 장악력은 한층 높아질 수 있다. 특히 여의도 입성을 노리는 윤석열 정부 출신 인사들이 많이 당선돼 선거 승리에 기여하면서 당정 관계를 좁힐지 관건이다. 기대대로 총선 승리를 거둔다면 레임덕을 늦추는 동시에 윤석열 정부의 핵심 사업들의 추진력 또한 강해지게 될 것으로 여겨진다.
윤석열 대통령은 2024년 1월 중순에서 하순 사이에 신년 기자회견을 진행하는 방안도 고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총선을 앞두고 쌍특검법(김건희 여사 주가조작 의혹’대장동 50억 클럽 의혹 특검법) 논란을 정면에서 돌파하기 위한 것으로 읽힌다. 윤 대통령은 지난해에는 신년사로 기자회견을 대신했다.
1987년 민주화 이후로 대한민국 대통령들은 예외 없이 3년차 징크스에 빠졌다. 임기 반환점을 도는 3년차인 만큼 현재 권력과 미래 권력의 전환기를 맞아 레임덕 현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재임 3년차를 맞은 1995년, 김종필 전 국무총리는 집권당이던 민주자유당을 탈당해 자유민주연합(자민련)을 창당했다. 3당 합당으로 만들어진 보수대연합에 금이 가 여권 분열이 일어난 것이다. 자민련은 이듬해 열린 15대 총선에서 충청도 지역을 기반으로 50석을 확보해 정계개편을 성공하기도 했다.
1995년에는 대구지하철 공사장 가스폭발 사고와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등도 발생했다. 참사가 이어지자 김영삼 전 대통령을 향한 여론이 악화되기도 했다.
다만 김영삼 전 대통령은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 축재 사건, 역사 바로세우기, 개혁 공천을 통한 인적쇄신 등을 통해 민심 이반을 막아내 제15대 총선에서 수도권 96곳(서울 47+경기 38+인천 11) 가운데 54석을 얻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김대중 정부 3년차인 2000년에는 국민의정부 3대 게이트로 꼽히는 진승현’정현준 게이트가 터졌다. 진승현 게이트에서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꼽히는 권노갑 새정치국민회의 국회의원의 금품 수수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권 의원은 재판 결과 무죄 판결을 받았다.
그 뒤로 전형적인 권력형 게이트로 불리는 이용호 게이트와 함께 윤태식 게이트 등이 터지면서 김대중 대통령의 세 아들이 구속되는 일이 일어났다. 잇따른 게이트 때문에 김대중 정부는 ‘게이트 공화국’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레임덕을 가속화한 사례로 꼽히는 행담도 개발 의혹과 부동산값 폭등이 일어난 해도 노무현 정부 3년차였던 2005년이다.
행담도 개발 의혹 사건은 한국도로공사가 추진하던 행담도 개발 사업에 노무현 전 대통령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것으로 알려진 문정인 전 동북아시대위원회 위원장과 정태인 전 청와대 국민경제비서관이 개입한 것이 아니냔 혐의로 수사를 받은 사건이다. 대법원에서 문 전 위원장은 무죄, 정 전 비서관은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이명박 정부 3년차였던 2010년에는 국무총리실 산하의 공직윤리지원관실이 민간인을 불법 사찰했다는 의혹으로 검찰 수사가 시작됐다. 경북 영일, 포항 출신 공직자 모임인 영포목우회(영포회)와 이명박 전 대통령의 17대 대선 외곽지원 조직이었던 선진국민연대의 인사 개입 의혹을 둘러싼 ‘영포라인’ 논란도 일어났다.
여당이 친박(친박근혜)과 친이(친이명박)으로 분열되면서 이명박 전 대통령의 역점 사업이던 세종시 수정안이 국회에서 부결되기도 했다.
박근혜 정부 3년차였던 2015년은 ‘비선실세’ 논란이 싹트기 시작한 해다. 세계일보의 2014년 11월 보도로 처음 알려진 최서원(최순실)씨의 전 남편 정윤회씨의 국정개입 논란은 그 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 됐다.
아울러 새누리당에서 제19대 국회의원을 했던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이 극단적 선택을 하면서 남긴 로비 리스트로 인한 ‘성완종 리스트’ 사건이 일어나 정국을 흔들었다. 정부 시행령을 국회가 수정’변경토록 요구하는 국회법 개정안을 놓고 유승민 전 의원과 박근혜 전 대통령의 갈등이 심해지며 유승민 전 의원이 새누리당 원내대표를 사퇴하는 일도 벌어졌다.
문재인 전 대통령도 3년차의 위기를 피하지는 못했다. 문 전 대통령은 3년차임에도 남북 관계 개선을 바탕으로 남북미정상회동 등을 진행하면서 높은 지지율을 유지했다. 그러나 2019년 8월부터 조국 사태가 본격적으로 터지자 여론이 악화됐다. 이후 정치권 연루 논란을 일으킨 라임자산운용 사태가 일어난 해도 2019년이었다. 김홍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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