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치인더스토리는 매주 토요일, 한 주간 있었던 기업들의 주요 이슈를 깊고, 쉽고, 재미있게 파헤쳐 보는 코너입니다. 인더스트리(산업)에 스토리(이야기)를 입혀 해당 이슈 뒤에 감춰진 이야기들과 기업들의 속내를 살펴봅니다. [편집자]
“반도체가 거의 90%였다.”
지난 15일 윤석열 대통령의 네덜란드 국빈 방문 동행을 마치고 귀국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출장 성과에 대해 한 말인데요. 이 회장이 이번 출장에서 이뤄낸 성과에 비하면 다소 겸손한 대답인 것 같습니다.
이번 출장에서 삼성전자는 네덜란드 ASML과 차세대 노광 장비 개발을 위한 ‘EUV(극자외선) 공동 연구소 설립’에 관한 업무협약(MOU)을 맺었습니다. 내년부터 양사 공동으로 7억 유로(약 1조원)를 투자해 경기도 동탄에 차세대 반도체 제조기술 R&D 센터를 짓는 것이 골자인데요.
EUV 뭐길래
다소 생소하게 들릴 수 있지만 ‘EUV 노광 장비’는 반도체 업계에서는 의미가 아주 큽니다. 최근 반도체 업계가 ㎚(나노미터) 단위의 경쟁에 돌입한 상황에서 EUV 장비는 승패를 가를 열쇠이기 때문입니다.
반도체 회로는 현미경을 사용해야 겨우 관찰할 수 있을 정도로 미세하기 때문에, 반도체 웨이퍼에 회로를 그리기 위해서는 빛을 이용해야 합니다. 이것이 노광 공정인데요. EUV 노광 공정은 약 190~1㎚까지의 자외선인 EUV를 사용해 빛을 쬐는 기술입니다. EUV는 기존 반도체 장비에 사용되는 광원(193㎚)보다 파장이 짧습니다. 덕분에 기존 불화아르곤(ArF) 공정보다 14배 정도 얇은 회로를 그릴 수 있죠.
7㎚ 이하의 초미세 공정을 구현하려면 EUV 장비가 필수인데요. 이를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공급하는 회사가 ASML입니다. 장비 한 대당 2000억원 이상의 고가 장비임에도 연간 생산량이 40~50대 수준에 불과해 반도체 기업들은 치열하게 장비 쟁탈전을 벌이고 있죠. ASML이 반도체 업계의 ‘슈퍼 을(乙)’로 불리는 이유기도 합니다.
특히 이번 협력은 기존 EUV 장비에서 한 단계 나아간 차세대 EUV 장비, ‘하이 뉴메리컬어퍼처(이하 하이NA)’의 연구라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깊습니다. 삼성전자는 현재 전 세계 파운드리 1위 기업인 TSMC, 미국 인텔 등과 2㎚ 공정에서 기술 선점을 위한 경쟁을 펼치는 상황인데요. 파운드리 첨단 공정 기술 혁신은 ‘EUV 노광 장비를 얼마나 많이, 빠르게 확보하느냐’가 가장 중요합니다. 특히 2㎚ 이하 공정에서는 ASML이 조만간 출하할 하이NA EUV 장비가 필수적이죠.
ASML의 하이NA EUV 장비 1대당 가격은 기존 EUV 장비보다 가격이 2배가량 비싼 4000억원 이상이라고 하는데요. 높은 가격에도 불구하고 벌써 주문이 밀려 있는 상황이라고 합니다. 이 탓에 삼성전자를 포함한 TSMC, 인텔 등 다양한 파운드리 업체가 이 장비를 먼저 확보하기 위해 치열한 물밑 작전을 벌이고 있는데요. 현재 업계에 따르면 인텔이 6대, 삼성전자와 TSMC가 2025년 각 5대씩을 확보한 것으로 알려집니다.
특히 EUV는 파운드리 분야에서만 꼭 필요한 장비가 아닙니다. 최근에는 오히려 최첨단 메모리(D램) 공정에서도 핵심 장비로 쓰입니다. 수율 등을 고려했을 때 D램 14㎚ 공정부터는 EUV 장비 사용이 필수가 됐기 때문이죠.
‘협력’ 넘어 ‘동맹’까지
이런 상황에서 삼성전자가 ASML의 차세대 EUV 연구개발 파트너가 됐다는 것은 고무적입니다. 삼성전자가 이번 EUV 공동 연구를 통해 최첨단 메모리 개발에 필요한 차세대 EUV 양산 기술을 조기에 확보할 것으로 기대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죠.
이번 출장길에 함께 했던 경계현 DS(디바이스솔루션) 부문장(사장)은 “삼성이 하이 NA EUV에 대한 기술적인 우선권을 갖게 됐다, EUV가 가장 중요한 툴 중 하나기 때문에 이를 통해 전체적인 반도체 공급망 입장에서 굉장히 튼튼한 우군을 확보했다”며 ASML과의 협력 강화에 따른 기대감을 드러냈습니다.
이어 “이번 협약은 경기도 동탄에 공동 연구소를 짓고 하이 NA EUV를 들여와 ASML 엔지니어와 삼성의 엔지니어들이 같이 기술 개발하는 것이 주목적”이라며 “장비를 빨리 들여온다는 관점보다는 공동 연구를 통해 삼성이 하이 NA EUV를 더 잘 쓸 수 있는 협력관계를 맺어가는 게 더 중요하다”고 설명했습니다. 또 “장기적으로 D램이나 로직에서 하이 NA EUV를 잘 쓸 수 있는 계기를 만들지 않았나 생각한다”고 부연했죠.
ASML이 해외 반도체 제조 기업과 R&D 시설을 짓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는 점에서도 뜻깊습니다. ASML 역시 글로벌 메모리 반도체 1위 국가인 한국에 투자하는 것이 차세대 노광 기술 확보에 유리하다는 전략적 판단이 있었겠죠. 또 이 결정에는 이재용 회장과의 관계도 한 몫을 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 회장은 초미세 공정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ASML의 EUV 노광 장비 확보가 필수라고 보고 2000년대부터 ASML과 긴밀한 관계를 맺어왔습니다. 이 회장은 2020년 10월에 이어 지난해 6월에도 직접 ASML 본사를 찾았습니다. 이에 화답해 피터 베닝크 ASML 최고경영자(CEO)도 2020년 11월 삼성전자 화성 캠퍼스에 방문했고, 지난해 11월에는 한국 진출을 본격화했습니다.
ASML은 내년 입주를 목표로 약 2400억원 규모의 화성 캠퍼스를 짓고 있는데요. 기공식에 앞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베닝크 CEO는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의 인맥을 과시하기도 했습니다. 베닝크 CEO는 “이재용 회장과는 보통 사업 환경에 대한 광범위한 대화를 나누지만, 수년 동안 인연을 쌓아와 개인적인 대화도 나눌 정도로 친밀해졌다”고 언급했죠.
두 회사는 지분 관계로 얽혀있기도 합니다. 삼성전자는 지난 2012년 ASML 지분 투자를 통해 파트너십을 강화했는데요. 당시 삼성전자는 ASML 지분 3%를 7260억원에 매입했습니다. 현재는 일부를 매각해 0.4%(158만407주)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죠.
역전 발판 다졌다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올 3분기 기준 삼성전자의 전 세계 파운드리 시장 점유율은 12.4%로 점유율 1위인 TSMC(57.9%)와의 격차가 큰 상황입니다. 업계 1위인 메모리 반도체도 업황 부진 여파로 3개 분기 연속 적자 상태입니다. 올 3분기 연결 기준 DS 부문 영업손실은 3조7500억원으로, 올해 3개 분기 누적 적자만 12조6900억원에 달하죠.
삼성전자가 이번 협력을 통해 경쟁사 대비 EUV 장비 선점에 유리한 위치에 오른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파운드리 시장에서 TSMC와의 격차를 좁힐 수 있는 역전의 발판이 마련된 것이죠. 삼성전자가 이를 제대로 딛고 반도체 한파를 이겨내며 1위 추격에 성공할 수 있을지 지켜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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