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출 주력’ 반도체 대규모 적자…자국주의 심화에 공급망 위기 고조
감산·전동화 전환·공급망 다변화 등 자구노력 이어져
(서울=연합뉴스) 한상용 장하나 김동규 기자 = 올 한해 국내 산업계는 미중 갈등에 따른 공급망 재편,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등 지정학적 리스크, 고금리로 인한 소비 부진 등 복합 위기에 짓눌렸다.
특히 미국 반도체법과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중국의 수출제한 조치 등 글로벌 자국주의가 심화하며 자칫 불똥이 튈까 촉각을 곤두세워야 했다.
우리나라 수출을 떠받치던 반도체는 경기 침체의 직격탄을 맞아 분기마다 수조원씩 적자를 냈고, 완성차 업체들도 미래 자동차산업 핵심인 전동화에 대한 대응 마련에 분주한 한 해를 보냈다.
◇ ‘반도체 한파’에 대규모 적자…수요 위축·고유가 악재
작년 하반기부터 이어진 반도체 한파는 시장의 예상보다 더 심각했다.
삼성전자는 1·2분기 영업이익이 90% 넘게 쪼그라들며 금융위기 이후 14년 만에 처음으로 1조원대 이하로 주저앉았다. 통상 삼성전자 영업이익의 60∼70%를 차지하던 반도체 부문은 1∼3분기 누적 12조7천억원의 적자를 냈다.
SK하이닉스도 1∼3분기 합산 8조원의 영업손실을 기록했다.
한국무역협회는 올해 반도체 수출이 작년보다 24.2% 줄어들 것으로 내다봤다.
상반기 원유 가격 하락으로 석유제품(-16.0%) 수출이 부진했고, 석유화학(-16.0%)도 약세를 면치 못했다.
디스플레이(-10.0%), 섬유류(-9.8%), 무선통신기기(-9.6%), 철강(-7.1%) 등도 올해 수출이 꺾일 전망이다.
무역협회는 한국의 13대 주요 수출 품목 중 8개 품목의 수출이 작년보다 줄어들 것으로 추정했다.
전기차 시장 확대로 승승장구하던 배터리 업계는 장애물을 만나 ‘숨 고르기’ 모드에 돌입했다. 경기 침체와 고금리 기조, 전기차 보조금 축소 등으로 전기차 시장 성장세가 둔화한 탓이다.
철강 업계는 수요 위축과 고유가, 탄소중립을 비롯한 환경 규제 등으로 녹록지 않았다.
한때 반도체, 정유와 함께 ‘수출 3대 효자’로 불렸던 석유화학도 불황의 늪에 빠졌다. 수요가 위축된 가운데 최대 고객이던 중국이 대규모 공장 신·증설로 석유화학 자급률을 끌어올리면서 경쟁이 심화한 것도 영향을 미쳤다.
◇ 글로벌 자국주의 심화…공급망 리스크 고조
산업계 전반에 경기 불확실성을 더한 것은 글로벌 자국주의 심화다. 미국 IRA, 유럽연합(EU)의 탄소국경조정제도(CBAM), 중국의 수출제한 조치 등 보호무역장벽이 세워지면서 산업계는 힘든 한 해를 보내야 했다.
각국이 자국 산업 보호를 위해 보조금 문턱을 높이는 상황에서 정부와 산업계 모두 ‘보조금 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총력전을 폈다.
미국이 반도체법상 보조금을 받는 기업에 대해 중국 내 첨단 반도체 생산량 확장 범위를 5% 이하로 확정하고, 중국 내 생산시설에 대한 반도체 장비 반입을 사실상 무기한 유예하면서 반도체 업계는 그나마 한숨 돌렸다.
중국과 합작법인 설립을 추진하던 배터리 업계는 미국이 중국 자본의 지분율이 25%를 넘는 합작법인을 IRA 보조금 지급 대상에서 제외하기로 하면서 지분율 조정에 따른 추가 부담 등을 우려하고 있다.
배터리 핵심 광물 공급망에서 중국 비중이 압도적인 만큼 대(對)중국 의존도를 단기간에 개선하기 어렵다는 점도 문제다.
실제로 미국의 첨단산업 제재에 맞서 중국이 자원 무기화에 나서면서 공급망 리스크는 고조되고 있다.
중국은 갈륨·게르마늄 수출 통제, 희토류 수출 보고 의무화에 이어 흑연의 수출 제한에 나섰다.
글로벌 메탈·광산 시장조사업체 CRU에 따르면 동력 배터리 제조용 광물에 대한 중국의 점유율은 흑연 70%, 망간 95%, 코발트 73%, 리튬 67%, 니켈 63% 등이다.
대한상공회의소 조사 결과 올해 물류업계 최대 관심사로 ‘글로벌 공급망 불안 지속’이 선정되기도 했다.
그나마 정부가 IRA에 적극 대응해 미국 시장에서 한국산 렌트, 리스 등 상업용 친환경차에 보조금 혜택을 받아내 북미 시장으로의 자동차 수출은 11월까지 331억달러로, 작년보다 44.3% 증가했다.
또 첨단산업에 투입되는 자원은 아니지만, 중국은 경유 차량 배출가스 저감장치 등에 쓰이는 산업용 요소와 화학비료의 원료인 인산안모늄에 대한 수출 통제에도 나섰다.
올해 1∼10월 산업용 요소의 중국 의존도가 91%에 달해 ‘제2의 요소수 대란’ 우려가 나오기도 했다. 2021년 ‘요소수 대란’에 따른 교훈으로 현재 7개월분의 재고를 확보한 상태지만, 중국의 수출 제한이 언제든 국내 수급 불안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뜻한다.
◇ 감산에 선제 투자까지…치열한 생존 모색
예상보다 경기 회복이 더디게 진행되는 가운데 산업계는 다양한 돌파구로 생존을 모색했다.
삼성전자는 25년 만에 처음으로 ‘메모리 감산’을 공식화하며 업계의 감산 움직임에 동참했다. 여전히 수요 회복은 더디지만, 메모리 업계 1위인 삼성전자의 동참으로 가격 하락세는 멈추는 분위기다.
반도체 업계는 인공지능(AI) 시장 확대로 수혜가 예상되는 고대역폭 메모리(HBM) 등으로 기술 경쟁력을 키우며 다가올 업턴(상승 국면)에 대비하고 있다.
자동차 업계도 미국과 EU는 물론, 프랑스, 일본 등이 자국 기업을 보호하고 전기차 공급망에서 중국 영향력을 줄이고자 보조금과 관세 개편안 등을 추진하자 대응책 준비를 서둘렀다.
현대차그룹은 올해 11월 울산에 전기차(EV) 전용 공장 착공에 들어가 2026년부터 연 20만대 전기차를 생산하겠다는 계획을 공개했다. 같은 달 싱가포르에는 첨단 자동차 제조 기술을 갖춘 ‘글로벌 혁신센터’를 준공하기도 했다.
전동화 전환에 속도를 내 2030년 전기차 200만대를 판매하는 것이 목표다.
배터리 업계는 북미 지역에 대규모 투자를 단행하며 북미 생산 능력을 확대해 생산 세액공제(AMPC) 혜택을 노리는 등 미중 경쟁의 틈에서 기회를 찾기도 했다. 공급망 다변화 노력도 진행 중이다.
국내 배터리 업계의 누적 수주 잔고는 1천조원을 넘어섰다.
정부는 첨단 반도체 제조에 필수인 특수 가스부터 요소 같은 범용 상품에 이르기까지 185개 품목을 ‘공급망 안정 품목’으로 정해 수입 의존도를 낮추고, 중국 등 특정국 의존도가 특히 높은 이차전지 음극재와 양극재, 희토류 영구자석 등 8대 분야는 특별 관리하기로 하는 등 상시화된 공급망 위기에 대응하기로 했다.
hanajjan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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