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대기업 임원의 퇴직일기
‘철퍼덕’ 병원 대기실 의자에 앉아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데 가까이서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언제 이름이 불릴지 몰라 졸음을 간신히 참고 있는 상황이었다. 화들짝 놀라 소리가 나는 쪽을 보았다.
할아버지 한 분이 쓰러져 계셨다. 혼자 걷다 넘어지신 듯했다. 다치신 곳이 없는지 걱정이 되었지만, 우선은 일어나시도록 해야 했다. 한눈에 뵙기에도 체구가 크셔서 혼자 힘으로는 불가능해 보였다.
후미진 대기 장소를 나와 사람들이 보이는 곳까지 달려갔다. “저기요, 도와주세요!” 다급한 목소리에 한 젊은 남성분이 달려와 주었다. 짧은 시간이긴 해도 보통의 사람이라면 툭툭 털고 일어났을 시간이었다. 여전히 한 손으로 바닥을 짚어 중심을 잡으려 안간힘을 쓰시는 모습과 튕겨져 나간 낡고 두꺼운 지팡이를 보아 거동이 불편하신 분이심이 짐작되었다.
“어르신, 다치신 데는 없으세요?” 겨우 앉혀 드리고 한숨을 돌리며 여쭈었다. “……” 괜찮다, 고맙다 한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화난 듯 보이는 무표정한 표정에 멋쩍은 생각이 들었다.
간신히 앉혀드렸건만 곧 일어나려 하셨다. 부축도 마다하고 화장실 쪽으로 걸어가시는 뒷모습이 생각보다 심각해 보이셨다. 뻣뻣한 한쪽 팔다리를 지팡이 하나로 감당하시기엔 역부족 같았다.
도무지 혼자 다니시면 안 될 것 같은 모습에 누군지도 모를 자제분을 나무라는 주제넘은 생각을 잠시 하였다. ‘맞다!’ 그제서야 친정 아빠가 생각났다.
휠체어에 앉혀 드리고 영상 촬영실 앞에서 순서를 기다리고 계시라 하였었다. 차례가 지났는지도 궁금하였다. 급히 확인을 해보니 아빠도 순서도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안심이 되었다.
공교롭게도 나의 퇴직과 맞물려 친정 부모님의 건강이 부쩍 나빠지셨다. 오랜 기간 뇌경색과 우울증을 앓고 계시는 친정엄마는 그렇다 쳐도 친정 아빠는 하루가 멀다 하고 병원 응급실 신세를 지셨다. 어느 날은 허리가 아프셔서 어느 날은 갑작스러운 토혈로, 그 증상도 다양하였다.
그럴 때 친정 부모님께서 제일 먼저 연락하시는 사람은 나였다. 비교적 가까운 곳에 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는 회사에 매여있지 않아서 조금은 편하신 듯 보였다. 처음 한두 번은 지금껏 못다 한 효도를 해야겠다 생각했는데 몇 달이 지나고 해를 넘기는 동안에도 상황이 나아지지 않으니 점점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휴대전화가 울리고 친정엄마의 번호를 확인하면 숨이 막히고 겁부터 났다. 대부분은 모든 일을 중단하고 급하게 달려가야 했다. 어렵게 잡은 일과 약속을 취소한 적이 여러 번, 더 이상 무엇인가를 계획하며 살 수가 없는 상황이 되었다.
늘 긴장하며 사는 동안 부모님에 대한 원망과 불평도 함께 커져갔다. 내가 회사에서 잘리지 않았으면 어떡했을 것이냐는 심한 말을 부모님께 쏟아붓기도 하였다.
미안하다며 알아듣기조차 어려울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대답하시면, 그에 대고 미안하면 다냐고 되받아치기도 하였다. 당연히 해야 함을 알지만, 마음을 추스르기가 쉽지 않았다.
쓰러지신 할아버지의 모습은 또 다른 상상을 하게 만들었다. 친정 아빠가 나와 함께 오시지 않았으면 어떠셨을까.
택시를 잡고 병원까지 오시는데 진이 다 빠지셨을 것이고, 이리 가라 저리 가라 잘 알지도 못하는 병원을 헤매시느라 맥이 풀리셨을 것이며, 사람이 아닌 기계를 상대로 접수를 해야 한다니 당황하셨을 것이다. 그 과정을 아빠의 여윈 다리가 잘 버텨내었을까. 몇 번이나 넘어지시며 사람들의 부축을 받는 동안 스스로를 한탄하며 마음이 무너져 내리셨을 것이다.
그 생각을 하니 눈물이 핑 돌았다. 독특한 성품 때문에 고독하고 굴곡 많았던 친정 아빠의 지난 한평생도 가끔은 가여워 눈물 나는데, 연로하신 지금에도 그렇게 사시게 할 수는 없었다. 언젠가 아빠를 보내드리는 날, 두고두고 후회로 가슴에 사무칠 것 같았다. 다행이었다. 내게 다닐 회사가 없어서….
순간만큼은 내가 퇴직한 사실이 감사하게 느껴졌다. 언제든 친정 부모님을 병원에 모실 수 있다는 것이 축복처럼 생각되었다. 그 마음을 담아 아빠를 태운 휠체어를 힘껏 밀었다. 여느 때보다 뻑뻑한 바퀴였지만 전혀 힘들게 느껴지지 않았다.
*본 기사는 사례뉴스 필진기자 ’어느 대기업 임원의 퇴직일기’ 정경아 저자가 쓴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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