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과거로 돌아갔다. 코로나19 팬데믹(대유행) 기간에 국민 4명 중 1명이 이용한 비대면진료가 감염병 위기단계가 ‘심각’에서 ‘경계’로 조정되는 다음달부터 다시 불법이 된다. 관련법을 정비해 미리 대비해야 했는데도 정부와 정치권이 의료계의 반발을 의식해 머뭇거린 탓이다. 그렇게 3년의 시간을 허비하고 정부가 임시방편으로 내놓은 카드는 23년 전부터 수차례 진행한 시범사업이다. 국민 1379만명이 2만5967개 의료기관에서 3660만건 이상 이용하고 그 효용을 입증했는데도 이제와서 또다시 시범사업이라니 퇴보도 이런 퇴보가 없다.
그나마 시범사업 방식도 문제다. 정부가 한시적 허용기간과 달리 ‘재진’ 중심으로 비대면진료 시범사업을 추진하면서 환자의 진료이력 공개부터 의료수가 책정문제까지 각종 논란이 불거지고 있다. 특별한 문제도 없고 대다수 국민이 만족하는 서비스를 반쪽짜리 시범사업으로 시행키로 하면서 시장의 혼란과 갈등만 부추기는 꼴이 됐다.
업계에선 정부 방침대로 재진 중심의 시범사업이 시행되면 국민 불편은 커지고 ‘타다 사태’처럼 관련 플랫폼 스타트업들은 생존 위기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고 호소한다. 국내 2000여개 스타트업단체 코리아스타트업포럼 산하 원격의료산업협회(이하 원산협)는 “시범사업은 사실상 사형선고”라며 “몇십 년 전부터 해온 시범사업과 무엇이 다른 것인지 이게 규제개혁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현장에서 실현 불가능한 시범사업안을 내놓으면서 전 국민을 혼란에 빠트렸다”고 비판했다.
역대 정부마다 규제개혁을 내세웠지만 혁신을 옥죄는 열악한 환경은 좀처럼 변하지 않고 있다. 승차공유 등 해외에서 활발하지만 국내에선 기득권과 규제에 발목이 잡혀 제대로 꽃피우지 못하는 신산업·신기술이 한둘이 아니다. 비대면진료만 해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중 제도적으로 금지한 나라는 한국뿐이다. 정보불균형을 해소하고 국민 편익을 높이는 부동산, 법률, 세무 등 플랫폼 스타트업들은 기득권의 반발에 막혀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다.
촘촘한 규제 때문에 글로벌 100대 유니콘(기업가치 1조원 이상 비상장기업)의 절반 이상은 ‘한국에서 온전하게 사업할 수 없다’는 조사결과도 있다. 청년창업지원 공익재단인 아산나눔재단이 지난해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글로벌 100대 유니콘 가운데 12곳은 한국에서 사업이 아예 불가능했고, 43곳은 제한적으로만 할 수 있었다. 아산나눔재단은 2017년에도 비슷한 보고서를 냈는데 당시엔 56개사가 한국에서 제대로 사업하기 어려운 것으로 조사됐다. 5년간 나아진 게 별로 없는 셈이다.
국내 스타트업들이 해외로 눈을 돌리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한국무역협회(KITA)가 지난해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스타트업 4곳 중 1곳이 ‘국내 규제로 해외 이전을 고려하고 있다’고 답했다. 규제를 피해 아예 해외에서 창업하는 사례도 계속 늘고 있다. 똑같은 기술력과 사업 아이디어가 있어도 국내에서는 꿈을 펼치기 어려우니 해외로 떠나고 싶어하는 것은 당연하다.
규제개혁이 더딘 가장 큰 이유는 정부와 정치권의 정치력 부재 때문이다. 혁신성장을 위해 신구 산업간 갈등을 조정하고 사회적 타협을 이끌어야 할 정부와 정치권이 매번 기득권의 눈치를 보는데 급급해 수요자가 아닌 공급자 중심의 논의만 하면서 타다 사태와 같은 일이 반복되는 것이다. 이대로라면 디지털 전환 시대에 한국 경제는 글로벌 경쟁에서 뒤처질 게 뻔하다.
규제개혁이 또다시 공수표로 끝나지 않으려면 대통령이 직접 챙겨야 한다. 우선 혁신기술과 서비스부터라도 원칙적으로 허용하고 예외적으로 금지하는 ‘네거티브 규제’ 방식을 전면도입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이해당사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되 공급자가 아닌 수요자인 국민의 관점에서 결정하고 필요하다면 국회를 찾아 설득해야 한다. 디지털 전환으로 글로벌 산업 지형도가 급변하고 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그리 많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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