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남 아파트 디에이치자이개포의 커뮤니티 시설에 조성된 입주민 전용 영화관 디에이치시네마 /사진제공=RNR |
# 40대 개인사업가 A씨는 평소보다 일찍 퇴근해 친분이 있는 아파트 주민 몇 명과 모임을 했다. 아파트 커뮤니티센터의 입주민 전용 상영관에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개봉작을 함께 봤다. 고급소파에 몸을 묻고 와인을 마시면서 2시간을 편안히 즐겼다. 관람비는 프리미엄 영화관의 3분의 1 정도만 들었다.
# 30대 직장인 B씨는 모처럼 휴가를 내 호캉스를 갔다. 일산의 한 호텔에서 저녁을 먹기 전 영화를 봤다. 젊은층에 인기가 많은 일본 애니메이션 영화였는데 멀티플렉스에 갈 필요가 없었다. 호텔 안에 상영관이 있었다. 비치된 미니바에서 음료를 챙겨 들고 리클라이너 소파에 앉아 무릎 담요를 덮었다. 편안하고, 쾌적했다.
아파트, 호텔, 회사 등 ‘나에게 최적화된 공간’에서 영화를 볼 수 있는, 콘텐츠 유통 기업 RNR의 모노플렉스(MONOPLEX)가 최근 주목을 끌고 있다. 멀티플렉스 개봉작을 같은 시기에 상영하는 비스포크(소비자 맞춤형) 상영관이다. 단 하나(Mono)의 관(Plex)도 개봉관이 되고, 관객들에게 혁신적인(Revolutionize) 방식으로 휴식(Rest)을 제공한다.
코로나 이후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공간을 꺼리게 된 문화, OTT(온라인동영상서비스) 열풍처럼 꼭 극장이 아니어도 영화를 즐길 수 있는 문화가 확산되면서 모노플렉스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가족, 친구, 지인끼리 소규모로 영화를 즐겨보는 이들도 모노플렉스에 환호하고, 대중 관객들 못지 않게 ‘공간’을 소유하고 있는 이들도 수익 사업으로 이 새로운 관람 모델을 주목하고 있다.
석민철 RNR 대표 인터뷰 /사진=이기범 기자 leekb@ |
세상에 없던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
“기존 공간을 활용해 상영관을 만들고, 콘텐츠 배급은 물론 예매부터 정산까지 원스톱으로 운영 솔루션을 제공해 드립니다. 공간 소유주는 관객 입출입 체크나 청소 관리만 하면 됩니다. 기존의 공간과 인력을 활용하기 때문에 인프라 투자 비용, 운영·유지 비용이 적습니다. 멀티플렉스가 투자금을 회수하기까진 8~10년이 걸리지만 모노플렉스는 1년이면 되는 비즈니스 모델입니다.”
RNR 석민철 대표의 설명이다. 역사가 약 130년 된 영화는 사실 제작과 배급, 상영과 관람까지 중후장대한 산업이다. 하지만 최근 10년 사이 모든 프로세스가 급속도로 디지털화됐다. 석 대표는 멀티플렉스로 대표되는 기존 중후장대 시설장치 산업을 ‘디지털 배급업’, ‘콘텐츠 유통업’으로 재정의하고, 한국은 물론 글로벌 시장을 무대로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선보이고 나섰다.
멀티플렉스가 아닌 곳에서 개봉작을 상영하는게 어려운 비즈니스인가 싶지만 RNR 이전에 상용화에 성공한 곳은 없다. 지식재산권(IP) 및 배급 라이선스 계약, 예매, 정산 등 A부터 Z까지 수많은 프로세스에 수많은 이해관계가 얽혀 있다. 토털 솔루션을 제공하고,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의 수익 창출까지 가능케 한 것은 지금까지 세상에 없던 비즈니스 모델이다.
“영화 개봉작을 상영할 수 있는 시스템은 특수합니다. 프로젝터, 서버 등의 영사장비에 암호화 기능이 있어 콘텐츠를 콘트롤 합니다. 할리우드 표준 방식인데 난이도가 높은 작업입니다. 저희는 하드웨어를 구축하고, 콘텐츠를 공급하고, 운영 소프트웨어를 개발해 제공하고 있습니다. 모든 작업을 저희가 원격 대행해 드립니다. 모노플렉스를 운영하고 싶은 기관이나 개인은 클릭 한번으로 영화관을 가질 수 있습니다.”
모노플렉스는 현재 국내에 10곳이 운영 중이다. 지난달 서울 강남 영동대로의 랜드마크 아파트 디에이치자이개포의 커뮤니티센터에 ‘디에이치시네마’가 오픈했다. 다음달엔 제주도의 복합리조트에 2개관이, 6월에는 대기업에 임직원 전용관과 국내 대형마트에 키즈관이 문연다.
커뮤니티 시설이 진화하고 있는 아파트는 경제적 가치 상승까지 기대돼 모노플렉스 수요가 늘고 있다. 기존 공간을 활용해 추가 수익을 거둘 수 있는 호텔들도 관심이 많다. 기업도 회의실 등을 리노베이션해 회의나 프리젠테이션 뿐만 아니라 개봉작 상영이 가능한 복합 공간으로 만들 수 있다. 직원들이 나오지 않는 평일 저녁이나 주말에는 지역사회에 환원할 수도 있다.
개봉관이 없는 문화 소외 지역에선 지방자치단체와 협업해 변화를 만들 수 있다. 멀티플렉스는 아무리 작게 만들어도 약 20만명 정도의 관객이 들어야 BEP(손익분기점)를 맞추는데, 모노플렉스는 이보다 훨씬 적은 관객이어도 운영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문화 바우처 제도와 결합해 지역 문화 복지를 확대할 수 있다.
키즈 카페와 RNR의 시네마 솔루션을 결합한 파주 소재 ‘밀크북 바이 모노플렉스’ /사진제공=RNR |
태생적으로 글로벌 비즈니스, 영화 본고장 미국 시장 도전
RNR은 올해 모노플렉스를 가지고 영화의 본고장인 미국 시장의 문을 두드린다. 석 대표는 콘텐츠 확보를 위해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들과 이미 협의를 마쳤다. 석 대표의 사업은 태생부터 글로벌이 목표다. 영화 시장 규모가 국내는 글로벌 전체의 4.5%에 불과해 결국 주수익이 해외에서 나야 한다.
“영어를 모르던 초등학생 때 슈퍼마켓에 가면 제품들마다 쓰여 있는 ‘MADE IN KOREA'(메이드 인 코리아)가 항상 눈에 띄었습니다. 그 말의 의미를 알 게 된 후엔 제 자신이 자랑스러운 메이드 인 코리아가 되고 싶었습니다. 영화업계에서 20년을 일했지만 제작사도 하드웨어도 모든 게 미국 중심이었습니다. 글로벌 영화 산업에 메이드 인 코리아의 역사를 써보고 싶습니다.”
RNR은 2014년 설립 이후 멀티플렉스 하드웨어 공급, 디지털화, 유지보수 서비스 분야에서 국내 1위 업체가 됐다. 국내 상영관 3000개 중 1600개 이상을 관리한다. 중국, 베트남, 인도네시아, 미얀마에서도 성공을 거뒀다. 이것이 1단계 사업이고, 모노플렉스가 2단계 사업이다. 그리고 중장기적인 3단계는 글로벌 시장의 모노플렉스 콘텐츠 배급망을 바탕으로 영화의 IP를 매니지먼트하고 블록체인을 통한 조각투자까지 가능케 하는 시네마켓플레이스(CINE MARKETPLACE) 사업이다.
규모가 작은 영화들은 IP 매니지먼트가 안되고 있는데 시네마켓플레이스가 모노플렉스 배급망을 통해 이런 영화들의 개봉부터 수익화까지 매니지먼트하는 것이다. 석 대표는 영화는 크든 작든 팬덤이 있기 때문에 이 사업이 성공할 것이라고 본다. 그래서 굿즈 제작과 조각투자까지 구상 중이다. IP 조각투자 사업은 KB증권 등과의 토큰증권(ST) 협력체인 ST오너스에 참여해 협업하고 있다.
“궁극적으로 콘텐츠 유통 플랫폼으로서 글로벌 시장에 자리매김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메이드 인 코리아인 모노플렉스와 시네마켓플레이스를 온오프라인 콘텐츠 플랫폼으로 발전시켜 수출할 것입니다. 한국의 유통 플랫폼이 전세계에 깔리면 한국 콘텐츠의 해외 수출도 그만큼 촉진될 것입니다. 콘텐츠 수출 강화를 추진하는 정부도 제작 지원 외에 유통 플랫폼의 해외 진출에도 관심을 가져 줬으면 좋겠습니다.”
국내 최초 호텔 영화관 ‘케이트리 호텔 X 모노플렉스’ / 사진제공=RNR |
디즈니와 다른 방식으로 새로운 디즈니를 꿈꾸다
석 대표는 첫 직장이 CJ 영화사업부였다. JSA에서 군복무하다 토요일에 제대했는데 월요일에 출근했다. 한국의 영화산업이 충무로를 벗어나 CJ, 롯데, 오리온 등 대기업들 주도로 ‘산업화’되기 시작하던 때부터 일해 산업의 전면을 볼 수 있었다. 특히 필름에서 디지털로 영화산업의 인프라가 변화하던 시기에 디지털 전환의 실무자로 디즈니, 워너브러더스, 유니버셜, 파라마운트, 소니, 폭스 등 당시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들과 일했다.
CJ CGV에서 상영업을 이해하고, 할리우드 배급사와 일하면서 배급업을 이해했다. CJ를 떠나 아예 할리우드에서 4년을 일했다. 그리고 2014년 한국으로 돌아와 자본금 5000만원을 빌려 1인 창업을 했다. CJ 때부터 디지털 시네마를 준비하면서 내다봤던 사업들을 순차적으로 진행했다.
“회사가 수익을 내는 지표를 만들려고 창업 첫 1년은 월급도 안받았습니다. 이제 지난해 기준 임직원 52명, 매출 150억원에 이르는 회사로 성장했습니다.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배급과 상영을 포괄한 개봉작 상영 플로우와 생태계 모두를 이해한 가운데 사업을 한 것이 지금까지의 성과를 가능케 했다고 생각합니다.
석 대표의 최종 목표는 새로운 콘텐츠 생태계를 만드는 것이다. 최근 10년 사이 글로벌 콘텐츠 시장은 급격한 변화가 일었다. OTT가 생겨 급성장해 코로나 전인 2019년 이미 극장 박스오피스를 넘어섰다. 코로나 대유행 기간엔 영화관 박스오피스가 1년 사이에 70%나 축소돼 OTT만의 세상이 도래하는 듯했다. 그러나 곧 OTT의 성장 한계 전망에 넷플릭스 주가가 반년 만에 고점 대비 70% 급락했다. 오프라인과 온라인 플랫폼이 서로 ‘-70%’라는 지표를 주고 받았지만 어느 한쪽의 플랫폼이 소비자의 시간을 독점할 순 없을 것으로 보인다.
“오프라인과 온라인이 공존하는 새로운 생태계가 만들어질 것입니다. 그것은 일방적으로 콘텐츠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팬덤 이코노미와 상호작용을 하는 형태일 것입니다. 콘텐츠 업계에서 가장 성공적인 디즈니도 사실 오래 전 시스템입니다. 콘텐츠의 생성-소비 생태계는 지속적으로 변화해야 합니다. 과거엔 큰 물고기가 작은 물고기를 잡아먹었지만 이제는 빠른 물고기가 느린 물고기를 잡아먹는 시대입니다. RNR은 이 변화된 생태계에서 모노플렉스와 시네마켓플레이스라는 서비스를 중심으로 빠르고 유연하게 움직여 디즈니와 다른 방식으로 새로운 디즈니가 되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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