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구의 한 위스키바에서 직장인 정모씨(29)가 위스키를 마시고 있다./사진=김성진 기자. |
위스키바 남자 바텐더와 손님의 대화 주제는 입대 연도, ‘군번(軍番)’이었다. 남자 바텐더는 2011년, 손님은 2022년 군번이라고 했다. 손님은 휴가 나온 상태였다. 오랜만에 친구들과 시끌벅적하게 소주를 마시는 대신 그는 혼자 싱글몰트 위스키 글렌피딕 15년산 한잔과 위스키에 토닉워터를 섞은 하이볼을 마시고 있었다.
위스키바는 서울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에서 100m쯤 떨어져 있다. 일대는 전, 홍어 등을 파는 민속주점이 대부분이었다. 그 틈에 외벽이 누런, 1층 짜리 기와집 하나가 위스키바였다. 바는 20평 남짓 돼 보였다. 한쪽 벽에 위스키 병들이 빼곡했고 벽 앞에 가로로 5~6m 남짓 길게 바 테이블이 있었다. 시간은 저녁 7시였다. 남자 두쌍, 남녀 한쌍이 앉아 있었다. 홀에는 사람 3~4명이 앉을 둥근 테이블 세개가 있었다. 손님 9명이 테이블을 채웠다. 얼핏 봐도 20대, 조금 높게 보면 30대 중반쯤 돼 보였다. ‘요즘 이렇게 젊은 손님이 많으냐’고 묻자 바텐더는 “손님의 70~80%가 20~30대”라고 했다.
메뉴판은 없었다. 여자 바텐더는 “원하는 위스키 종류나 원하는 스타일을 말해달라”고 했다. 위스키를 시키면 블루베리 파이와 소고기 여섯점이 추가로 나온다. ‘이런 안주로 배가 부르느냐’ 묻자 20대쯤 돼 보인 여성 손님은 “배가 부르지는 않지만 위스키 향을 느끼기에는 양과 종류가 적당하다”고 했다.
저녁 7시30분쯤 가로로 긴 테이블 맨 안쪽에 검은 가죽 재킷 차림의 남성이 혼자 앉았다. 유튜브 편집 일을 한다는 정모씨(29)는두달에 한번쯤 머리를 식히거나 유튜브 아이디어를 정리할 때 위스키바를 찾는다고 했다. 친구와 오기도 하고 혼자 올 때도 있다.
정씨가 마신 피트 위스키 한잔. 설탕을 입힌 호두와 블루베리 파이가 기본 안주로 제공된다./사진=김성진 기자. |
정씨는 피트(Peat) 위스키를 마셨다. 피트는 연기 향이 강해서 호불호가 갈리는 위스키다. ‘위스키의 매력이 무엇이냐’고 묻자 정씨는 “위스키를 마시면 위로받는다”고 했다. 그는 전고운 감독의 영화 ‘소공녀’ 속 인물 미소(이솜 분)를 거론했다. 미소는 서른살 남짓 가사도우미로 돈은 없지만 매일 퇴근할 때 혼자 위스키바에 들려 글렌피딕 15년 산을 한잔 마신다. 정씨는 “직장에서 고민이 많고, 개인적인 일로 위로받고 싶을 때 위스키가 위로해주는 느낌이 있다”고 했다. 정씨는 위스키 두 잔을 마셨고 5만7000원을 냈다.
정씨 오른쪽 두자리 옆에는 이모씨(26)가 있었다. 이씨는 소주 등과 비교하면 위스키를 마시는 가격이 크게 부담스럽지 않다고 했다. 이씨는 “소주도 가격이 4000~5000원으로 싼 편은 아니지 않나”라며 “안주를 많이 시키기도 하고, 나름의 향과 맛을 느낄 수 있는 위스키가 낫다”고 했다.
목수, 위스키 좋아 바텐더 됐다…혼자 마셔도, 함께 마셔도 좋다
서울 성동구 성수동의 어느 위스키바. 이곳 바텐더 박모씨는 원래 목수였다. /사진=김성진 기자. |
최근 1년 20~30대 사이 위스키 인기가 뜨거웠다. 그동안 위스키를 종류 구분 없이 ‘양주’로 불렀다면 이제 상당수 20~30대가 싱글몰트, 버번, 피트 주종을 구분해 마신다. 희소한 위스키를 구하려고 가게 개장을 기다리는 ‘오픈런’도 한다.
1년 차 위스키 애호가 이승원씨(30)는 1인가구 증가를 위스키 열풍의 한 원인으로 꼽았다. 위스키는 집에서 혼자 먹기 좋았다. 와인과 달리 뚜껑을 다시 닫을 수 있다. 이씨는 “향이 풍부해서 조용히 혼자 먹기 좋다”며 “도수가 높아서 마시면 잠도 잘 온다”고 했다.
위스키를 함께 마시는 문화도 만들어졌다. 박모씨(25)는 서울 성수동에서 위스키 바텐더가 되기 전 목수였다. 건축 현장의 선배들은 밥 먹을 때 반주를 곁들였다. 한 사람당 소주 반병, 한병씩 마셨다. 저녁에는 이른바 ‘달렸다’. 박씨가 술 자체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소주는 맛이 없고 매일 1~2병씩 마신 술값도 아까웠다.
박씨의 스물한살 생일에 아버지가 축하한다며 자신이 신혼여행 갔을 때 샀던 21년산 발렌타인 위스키를 꺼내왔다. 위스키는 통 밖에 꺼내면 숙성 연도로 치지 않는다. 향과 맛이 달랐다. 소주처럼 입에 털어넣지 않고 한모금 입에 머금은 뒤 향을 즐기는 매력이 있었다. 잔에 따라두고 잠깐 화장실을 다녀 왔더니 향이 달라져 있던 점도 재밌었다.
이후 박씨는 한달에 한번꼴로 위스키 바를 갔다. 그곳에서 세살 많은 남성과 친해졌다. 둘 다 도수가 높은 버번 위스키를 좋아했다. 연락처를 교환하고 날을 정해서 만났다. 여기에 위스키 좋아하는 서로의 지인들이 더해져 지금은 단체메신저 방에 15명이 모였다. 많게는 1989년생, 적게는 2003년생 회원이 있다. 이들은 정기 모임을 하고 서로 산 위스키를 작은 병에 소분해서 나눠 마시기도 한다.
바텐더를 하면서 박씨는 20~30대 ‘위스키 열풍’을 피부로 느낀다고 했다. 이전에는 주로 40~50대가 위스키바를 찾았지만 20~30대 친구, 연인들이 바를 찾는다. 그는 위스키 열풍을 두고 “누군가는 젊은 세대의 철없는 돈 낭비라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라면서도 “소주보다 돈이 크게 더 드는 것도 아니고 종류가 다양하고 위스키마다 매력이 달라서 공부하는 재미, 동호회 회원들과 함께 즐기는 재미가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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