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정부가 철옹성 같던 금산분리 규제를 완화하는 논의에 착수한다. 산업 간 경계가 흐려진 만큼 금융자본과 산업자본 간에 처져 있던 칸막이를 손질해야 할 필요성이 커지면서다. 다만 파급력 있는 수준으로 규제를 완화하기에는 반대 여론도 만만치 않아 넘어야 할 산이 많은 상황이다.
26일 공정거래위원회의 대통령 업무보고 자료에 따르면 정부는 공정거래법상 금산분리 제도와 지주회사 제도 등의 중장기 발전방향을 모색할 방침이다. 윤수현 공정위 부위원장은 “금산분리 규제는 큰 틀에서 논의할 생각”이라면서 “중장기 발전방향이라 당장 어떤 거라고 말하기 어렵지만 규제가 강화되는 방향은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사실상 금산분리 규제완화를 검토하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금산분리란 금융자본과 산업자본이 상대 업종을 소유하거나 지배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이다. 은행이 대기업의 사금고로 전락하거나, 금융지주 회사가 산하 비금융 계열사에 자금을 몰아주는 폐단을 막기 위해 도입됐다. 한국에는 1982년 은행법에 은산분리 규정이 명시되면서 관련 규제가 탄생했다. 현재 한국에서는 특례를 받는 인터넷은행을 제외하면 산업자본이 금융자본 지분을 4% 이상 보유할 수 없다.
산업·금융계에서는 환경이 급변하는 만큼 관련규제도 달라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컸다. 금산분리 규정을 완화해 산업발전과 경쟁력 강화를 꾀해야 한다는 목소리다. 이에 금융위원회에서는 지난 7월 제1차 금융규제혁신회의를 열고 금산분리 완화를 주요과제로 논의했다. 주로 금융자본이 IT, 부동산, 소프트웨어, 디자인 등 다양한 사업을 영위할 수 있도록 비금융자회사 허용범위를 확대해주기로 했다.
공정위는 이에 발맞춰 산업자본의 입장에서 금융자본을 소유하는 방안을 집중적으로 논의할 전망이다. 2021년 일반회사도 금융사인 기업형 벤처캐피털(CVC)을 소유할 수 있게 됐는데, 관련 규정을 더 풀어주는 것도 대표적인 완화정책 중 하나다. 윤 부위원장은 “금융위가 추진하는 금산분리 규제완화는 공정위의 것과 조금 다르다”며 “일반 지주회사는 엑셀러레이터(창업기획사)를 보유할 수 없는데 이것도 CVC에 포함되도록 추진하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금산분리 규제완화 반대여론 넘어설까
엑셀러레이터란 초기 창업기업을 발굴한 뒤 투자와 함께 사업공간과 멘토링 등을 제공하는 종합보육서비스 기업을 말한다. 해당 규제가 완화되면 자금력이 풍부한 대기업이 엑셀러레이터를 계열사로 두고 스타트업에 복합적인 성장지원책을 제공하는 것도 가능해진다.
지주회사 제도도 논의 테이블에 올랐다. 김정기 기업집단국장은 “지주회사 제도는 IMF 위기 때 도입됐고 여러 부침이 있었지만 25년간 운용되는 등 너무 오래됐다”며 “지주회사의 변화와 운용실태를 점검해보고 중장기적으로 어떻게 끌고 갈지 논의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문제는 반대 여론이다. 금산분리 원칙은 국내 규제 중에서도 가장 첨예한 사안 중 하나다. 야당과 노조, 소비자 시민단체 등은 금산분리 규제가 완화되면 오히려 부작용만 더 늘어난다는 입장이다. 기업들이 늘어난 투자비용을 소비자에게 전가하거나, 유사 금융업을 영위하지만 규제를 제대로 받지 않는 ‘그림자금융’이 성행할 거라는 우려가 대표적이다. 거대한 산업·금융자본의 등장으로 경제·금융 건전성이 훼손될 거라는 비판도 있다.
반발을 무릅쓰고 금산분리 규제를 풀었다가 도로 회귀한 적도 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2009년 산업자본이 금융자본의 의결권 있는 주식을 9%까지 보유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하지만 경제민주화 바람이 불면서 2013년 다시 보유한도를 4%로 줄이는 ‘금산분리 강화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해 4년 만에 무산됐다.
이미 금산분리 완화기조에 대해 수용불가 입장을 밝힌 상태다. 박한진 금융노조 사무총장은 지난달 서울 중구 은행회관에서 “정부의 금산분리 완화에 대한 대응을 금융노조 2023년 주요 투쟁방향으로 설정했다”며 “2023년 3월2일 취임 예정인 차기 금융노조 집행부 선거공약 중 10대 핵심공약 가운데 하나가 금산분리 원칙 사수”라고 밝힌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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