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자동차 산업에는 크고 작은 일들이 벌어지며 급변하는 한 해였다. 특히 전기차는 여러 차례 입방아에 오르내리며 유독 힘겨운 시기를 보냈다.
엎친 데 덮친 격, 전기차 화재가 몰고 온 위기
먼저 국내 이야기다. 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지난 8월 인천 청라 소재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서 화재 사고가 벌어지면서 전기차는 고난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수요 둔화 현상에 ‘포비아(공포)’까지 더해지며 홍역을 앓게 된 것이다. 예상치 못했던 화재 사고는 국내 전기차 시장의 많은 변화를 불러왔다. 제조사들은 배터리 제조사 정보를 의무적으로 공개했고 정부는 충전율 제한을 비롯해 공동주택 지하 주차장에 전기차 출입 제한, 전기차 배터리 인증제 시범 사업 등의 대책을 내놓았다.
하지만 논란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중고차 시장에는 전기차를 팔려고 내놓은 물량으로 넘쳐났고 자연스레 시세 하락까지 이어졌다. 중고차 플랫폼인 케이카에 따르면 화재 사고 발생 직후 내차 팔기 홈 서비스에 접수된 전기차는 184% 급증한 것으로 나타났다.
사태가 심상치 않게 흘러가자 완성차 제조사들은 전기차에 대한 잘못된 정보를 바로잡기 위해 나섰다. 수입 완성차 제조사는 판매량이 급감하는 것을 위해 할인 폭을 키우며 전기차 포비아 대응을 시작했다.
정부는 사고 원인을 찾기 위해 마티아스 바이틀 메르세데스-벤츠 코리아 대표를 국토교통부 국정감사에 불러들였지만 결국 소득을 얻지 못했다. 약 4개월의 조사를 펼친 결과 메르세데스-벤츠는 형사 처벌을 피하게 됐고 스프링클러 작동을 멈춘 아파트 관리사무소 직원 등 4명만 업무상과실치상 혐의로 검찰에 송치됐다.
세계 최대 자동차 제조사도 흔들
글로벌 시장 역시 전기차 소비 둔화 현상을 피할 수 없었다. 특히 유럽 시장의 경우 역성장하며 돌파구를 찾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아우디와 포르쉐, 스코다 등이 포함된 폭스바겐 그룹은 전년 대비 1.3%의 역성장을 기록한 것으로 나타났다. 아우디의 전기차 Q4 e-트론과 Q8 e-트론, 플러그인 하이브리드 모델이 판매를 견인했지만 폭스바겐의 주력 모델인 ID. 시리즈는 부진을 털어내지 못했다. 이 같은 상황에 대해 업계는 유럽 시장 전략 모델들이 전기차 수요 심화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것으로 내다봤다.
폭스바겐 주력 모델의 판매 둔화는 경영 위기로 이어졌다. 폭스바겐 그룹은 올해 3분기 순이익이 60% 급감하는 등의 위기를 겪었다. 회사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3분기 순이익은 15억7600유로(2조3848억원)로 지난해 같은 기간 대비 63.7% 감소했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폭스바겐 그룹은 독일 공장 폐쇄까지 검토하기도 했다. 창립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현재는 공장 폐쇄가 아닌 직원의 임금을 30% 삭감하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았다.
유럽에 진출한 완성차 제조사도 기를 펴지 못했다. 미국 전기차 제조사 테슬라의 경우 유럽 시장에서 전체 판매량의 95%를 차지하는 모델3, 모델Y의 판매량이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테슬라는 유럽에서만 전년 동기 대비 9.9% 감소했다. 현대자동차그룹 역시 주력 모델인 현대자동차 아이오닉 5와 기아 EV6 등이 유럽 판매량이 역성장한 것으로 집계됐다.
中 전기차, 위기에도 무섭게 성장
세계 최대 자동차 제조사였던 폭스바겐이 뒷걸음치는 와중에도 중국 전기차는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가격 경쟁력과 다양한 라인업 등으로 무장한 대륙발 전기차가 자동차 산업을 흔든 것이다.
SNE리서치에 따르면 올해 1월부터 10월까지 전 세계 전기차 등록 대수는 전년 동기 대비 23.7% 증가한 1355만600대로 집계됐다. 이중 성장을 견인한 것은 모두 중국업체로 나타났다. 낮은 가격과 다양한 모델을 공격적으로 투입하면서 시장을 장악하고 있다.
브랜드별로 살펴보면 비야디(BYD)가 310만700대를 팔며 1위에 이름을 올렸다. 이는 지난해 같은 기간 대비 36.5%의 성장이다. 중국 지리그룹 역시 내수와 유럽에서 가파른 성장세를 그리면서 105만400대를 팔아 치웠다. 폭스바겐 그룹과 테슬라의 감소가 고스란히 중국 브랜드로 옮겨간 셈이다.
전기차 시장에 신규 진입한 브랜드들의 약진도 대단했다. 특히 중국 가전제품 업체 샤오미는 첫 번째 전기차를 내놓은 지 8개월여 만에 10만대 생산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샤오미는 전기차 시장 진출 선언 3년 만에 자체 개발한 첫 번째 전기차 ‘SU7’ 시리즈를 출시했고 출시 27분 만에 5만대 이상이 판매되는 진풍경을 만들었다.
중국 전기차 제조사들은 해외 시장 공략에 더욱 박차를 가할 전망이다. 니오는 유럽 시장에서 저가, 고가 전기차를 동시에 내놓으면서 시장 공략에 나선다. 니오는 하위 브랜드인 파이어플라이를 공개하고 내년 상반기 유럽 시장 진출을 선언했다.
비야디는 유럽 관세 장벽을 넘기 위해 유럽 현지에서 전기차를 생산할 예정이다. 비야디에 따르면 주력 모델인 ‘돌핀’과 ‘아토3’를 헝가리 공장에서 생산하며 해당 공장의 생산 능력을 한층 더 강화할 계획이다. 비야디는 내년 초 한국 승용차 시장에도 진출을 앞둔 만큼 세계 시장에서 점유율을 빠르게 높여 나갈 것으로 전망된다.
업계 관계자는 “2024년은 전기차 시장의 변곡점이 되는 해였다”며 “국내에서는 화재로 인해 전기차가 뒷걸음쳤고 전기차 수요 둔화로 주춤하던 해외 시장을 중국 전기차 제조사가 잠식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이어 “내년에는 중국 전기차의 공세가 더욱 거세질 것으로 예상된다”며 “미국과 유럽이 중국의 성장을 저지하기 위해 높은 관세를 매기는 등의 전략을 세우고 있지만 쉽게 중국발 전기차 공격을 막아내기 힘들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허인학 기자
ih.heo@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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