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천년대 초반 유럽 자동차 메이커들은 자동차를 포함한 개인운송 수단이 화석연료가 아닌 새로운 동력원을 찾아야 한다고 의견을 모았습니다. 다시 말해 가솔린과 디젤이 아닌 전혀 다른 추진 기술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고민이었죠. 100여년이 넘는 자동차 개발의 역사 가운데 수많은 엔지니어들이 고민했던 문제이기도 했지만 당시에는 이상적이거나 미래 먹거리 정도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풀어야 할 숙제로 받아들였습니다.
BMW는 유럽 프리미엄 자동차 메이커로서 이 논의를 행동에 옮긴 첫번째 주자였습니다.
그래서 시작한 프로젝트가 바로 오늘의 주인공 ’BMW H2R’입니다. 콘셉트카로 실제 양산까지 이어지진 못했지만 훗날 수소차 연구분야에 시금석처럼 여겨지는 모델입니다.
BMW는 자동차의 새로운 추진 기술 에너지원을 크게 3가지로 압축했습니다. 전기, 수소 그리고 하이브리드입니다. 이는 기존 가솔린과 디젤이라는 두 축을 완전히 해체하고 새로운 대안을 수립한다는 것인데 BMW는 수소로 경로를 택했습니다. BMW가 이런 선택을 한 배경에는 이미 BMW 연구소 자체적으로 수소에 대한 연구 기간이 긴 데다 연구인력도 충분했으며 독일은 이미 에너지 및 기후 목표의 대안으로 수소를 선택하고 있어 정부지원도 기대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실제 독일은 2045년까지 온실가스 중립을 달성하기 위한 에너지원으로 수소를 지목하고 ‘국가 수소 전략’을 수립했습니다. 참고로 독일의 이런 선택은 유럽 내에 많은 울림을 주었고, 이후 아시아의 다른 자동차 메이커들 역시 수소에 대한 추진기술 연구를 본격화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자 다시 BMW의 연구소로 돌아와… BMW 엔지니어들은 자신감이 넘쳤습니다. BMW 그룹 연구 및 기술 총괄인 레이먼드 프레이만 박사를 중심으로 하는 BMW 엔지니어들은 독일을 넘어 세계 최고 엔지니어 그룹으로 정평이 나 있었습니다. 심지어 프로젝트명 H2R 이전에 이미 7시리즈 세단을 기반으로 수소 연료 버전을 실험한 데이터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이죠. 당시 이 실험에서 출력과 토크 그리고 BMW가 필수적으로 생각하는 주행의 정교함을 기존 섀시에 6L V12 엔진으로 수소 에너지원을 활용해 이뤄냈습니다.
당시 이 실험 모델은 수소연료전지를 기반으로 한 전기차가 아니었고 전술한 대로 가솔린과 디젤 에너지원을 대체하는 형태로서 수소를 활용했습니다 다시 말해 수소를 기화체로서 엔진에 직접 분사하는 방식이었죠. 6L V12 엔진은 가솔린에서 수소로 연료를 바꾼 것이지만 수소 분사 밸브와 연소실 재료를 바꾸고 분사 밸브는 흡기 매니 폴드와 통합하는 방식이었습니다. 특히 수소는 가솔린처럼 엔진 실린더 내부의 윤활효과를 기대할 수 없었기 때문에 밸브 시트 세트만 따로 제작하기도 했습니다. 아울러 수소는 기체라는 특성이 있어서 가솔린보다 에너지의 단위당 부피가 더 커서 기존 분사 밸브보다 더 큰 수소 분사 밸브를 개발해야 했습니다.
BMW 엔지니어들은 선행 연구 덕분에 단 10개월만에 BMW H2R 프로젝트를 끝낼 수 있었습니다. 물론 이때부터 고도화되기 시작한 컴퓨터를 활용한 설계와 제조에 시간도 크게 단축했습니다. 주목할 점은 BMW 엔지니어들 스스로 BMW H2R의 양산 가능성을 그다지 높게 보지 않았고 오히려 기술적 표준을 수립하기 위해 레이싱 콘셉트카로 목표를 바꿨다는 점입니다. 압도적인 성능수치를 발휘해 이 차를 전세계 자동차 업계에 각인시키고자 했고 수소라는 새로운 동력원을 사용하는 차라는 점을 디자인으로 표현할 수 있는 작업도 새로 해야만 했습니다.
BMW H2R은 덴마크-아이슬란드 예술가이자 산업디자이너 올라푸르 엘리아손에 의해 BMW 760i에서 전혀 새로운 디자인으로 거듭났습니다. 탄소섬유 차체에 알루미늄 프레임을 씌워 무게도 1,560kg까지 덜어냈습니다. 공기저항계수는 현재 기준에서도 엄청난 0.21Cd까지 줄였죠. 낮은 차체, 유선형 조종석, 조절이 가능한 리어 윙까지 갖춰 고속에서 안정성도 압도적인 수치를 발휘했습니다. 애초에 목표로 한 건 아닌데 만들다보니 레이싱 카에 버금가는 아니 추월할 정도가 되어버린 셈입니다. 실제 이 차의 최고속은 수소차로선 지금도 깨지지 않는 기록인데 무려 302.4 km/h라는 엄청난 최고속에 다다른 차였습니다.
BMW H2R은 수소탱크를 모두 채우는데 3분이 걸렸습니다. 오늘날의 기준에서도 충분히 납득이 갈만한 시간이었죠. 게다가 주행거리도 충분해서 1회 충전 시 최장 322km를 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BMW H2R은 양산까지 이어지기에는 시대를 너무 앞서갔습니다. 특히 BMW H2R의 연료인 수소는 수소탱크에 저장했는데 이 수소를 극저온인 -253도까지 유지해야만 액체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고 연소 중에 후속 수소 및 공기 혼합물의 조기 발화를 방지하려면 각 실린더에 공랭식 장치들이 따라붙어 사실상 양산으로 밀어 부치기엔 넘어야 할 산이 너무 많았습니다.
BMW는 이 연구를 자사의 미래 연구물로 보존하기로 했고 엔지니어들은 마지막으로 BMW H2R로 세계 기록을 세워 기념하기로 했습니다. BMW H2R은 실망시키지 않았습니다. 2004년 9월 프랑스 미라마 테스트 트랙에서 가장 빠른 수소차를 비롯해 모두 9개의 세계 기록을 일거에 거두어 들입니다. 이 기록은 지금까지도 추앙하는 수소차 분야의 업적으로 인정받았고 2023년 영국의 모터스포츠 페스티벌인 굳 우드 페스티벌 오브 스피드(Goodwood Festival of Speed)에 다시 등장하기도 했죠.
BMW H2R의 차명 ‘H2R’에 대해선 ‘H Two Race Car’, ‘Hydrogen Record Car’, ‘Hydrogen Research Car’ 등 다양하지만 수소차 연구 분야에 뚜렷한 발자국을 남긴 것은 확실합니다.
BMW는 유럽 자동차 메이커 가운데 가장 앞선 수소연료전지차 기술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BMW H2R이 그 시작점이었다는 점에는 누구도 반기를 들기 어렵죠. 이젠 수소연료전지차를 위한 특수 구성 요소도 자체개발해 2015년부터 연료 전지 기술을 기반으로 한 BMW 5시리즈 GT도 선보였습니다.
다만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수소연료전지차의 패권은 오히려 한국과 일본 등 아시아로 넘어왔습니다. 현대자동차는 ix35를 최초로 상용화에 성공했고 일본 토요타 역시 ‘미라이’라는 세단형 수소연료전지차를 선보이며 이름값을 해냈죠. 최근 들어 BMW는 BMW iX5 하이드로젠으로 수소에 대한 미래를 그렸습니다. 탄소중립을 향한 자동차 회사들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고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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