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쯤은 ‘TPO’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패션에 대해 논할 때마다 늘 따라다니는 말이다. 이는 시간(Time), 장소(Place), 상황(Occasion)의 첫머리 글자를 따와 만든 말이다. 쉽게 말해 시간과 장소, 상황에 맞는 옷을 입어야 한다는 뜻이다.
TPO는 자동차와도 아주 밀접하게 맞닿아 있다. 패션처럼 자동차도 때와 장소, 상황에 어울리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아웃도어를 즐기는 장소에 중후한 세단을 타고 가는 것 혹은 슈퍼카를 타고 가는 건 어울리지 않는다. 아웃도어를 즐기는 사람들이 멋진 오프로더를 선택하는 이유다.
최근 아웃도어에 아주 잘 어울리는 자동차가 국내에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영국산 오프로더 ‘그레나디어’다. 그레나디어는 영국 자동차회사 이네오스 오토모티브(INEOS AutoMotive)가 오직 ‘전통’, ‘탈 것’에 초점을 두고 만든 진짜배기 오프로더다. 그레나디어를 보고 있으면 오프로드를 향한 이네오스의 열정이 고스란히 전해질 정도다. 마치 아웃도어에 딱 어울리는 기능성 재킷과 같은 느낌이다.
이네오스의 공식 수입원인 차봇모터스는 그레나디어가 맘껏 뛰어놀 수 있는 제대로 된 놀이터를 만들었다며 초대장을 보내왔다. 구미가 당기는 초대장이었다. 강원도 인제라는 물리적 거리쯤은 문제가 아니었다. 단숨에 초대에 응했고 옷장을 뒤적거리며 이네오스 그레나디어, 아웃도어에 어울리는 옷을 꺼내 입었다.
잠들어 있던 모험심 깨우는 그레나디어
오전 6시. 시간 내에 강원도 인제 스피디움에 마련된 이네오스 그레나디어 오프로드 파쿠르에 도착하기 위해 이제 막 해가 고개를 내밀기 시작한 시간부터 분주하게 움직였다. 3시간쯤 달렸을 때 이정표에는 인제 스피디이움이라는 글자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 놀이터에 다다랐다.
이네오스 그레나디어 오프로드 파쿠르는 차봇모터스와 인제스피디움이 마련한 오프로드 주행 체험 공간이다. 오프로드 애호가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놀이터다. 이 놀이터는 4만2970제고곱미터(㎡) 부지에 워터 해저드, 슬라이드 슬로프, 통나무 트랩, 경사로 등 11개의 오프로드 장애물 코스로 구성됐다. 일반적인 길이 아닌 푹푹 패이고 하늘로 솟은 험로 그 자체라는 뜻이기도 하다.
간단한 코스 설명을 들은 후 본격적으로 놀아보기 위해 놀이터에 입장했다. 하늘에서는 비가 내리고 있었고 각 코스는 금세 촉촉하게 젖어가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궂은 날씨가 원망스러웠겠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오히려 그레나디어의 험로 주행 능력을 제대로 평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전문 인스트럭터의 안내에 따라 코스에 발을 들여놓았다.
시작부터 험난 그 자체였다. 굵은 통나무를 타고 넘어야 했고 그 뒤에는 외나무다리 코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지레 겁을 먹었겠지만 인스트럭터의 자신감 넘치는 한마디가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켰다. “안전합니다. 차를 믿으세요” 그의 말처럼 그레나디어는 아무렇지 않게 코스를 뛰어넘었다. 점점 코스가 험악해지자 기어레버를 중립에 두고 동그란 트랜스퍼 기어 레버를 있는 힘껏 당겨 로우 기어를 체결한 덕분이다. 밖은 전쟁통이 따로 없었지만 실내는 고요했다. 그 흔한 잡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꽤 정교한 만듦새에 점차 그레나디어에 대한 믿음이 진해졌다.
범피 로드에 진입하기 전에는 오프로드 모드까지 활성화했다. 무적의 갑옷으로 갈아입은 셈이다. 한쪽 바퀴가 공중에 둥둥 떠 있었지만 코일오버 서스펜션과 프로그레시브 스프링이 차체를 붙잡은 덕분에 주행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스티어링 휠을 가볍게 쥐고 가속페달을 부드럽게 밟자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차분하게 길을 헤치고 나갔다.
무릎을 가뿐히 넘는 도강 코스도 아무렇지 않게 넘었다. 앞코가 물에 처박히자마자 물은 요동쳤지만 실내에는 단 한 방울도 들어오지 않았다. 물론 전기 장치에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도강 상황을 고려해 전기 배선에 어느정도 방수 기능을 적용한 덕분이다. 그레나디어는 최대 80센티미터(㎝) 깊이 물길쯤은 아무렇지 않게 달릴 수 있다. 별도로 마련된 도강 모드를 활성화하면 엔진을 식히던 라디에이터 팬도 15분간 멈춘다.
그레나디어가 아무렇지 않게 험로를 주파할 수 있는 비결은 파워트레인과 섀시에 있다. ‘목적에 걸맞은 제작(Built On Purpose)’라는 철학을 바탕으로 완성된 그레나디어는 차체 디자인에만 무려 3년이라는 시간을 쏟아부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차체에는 BMW의 3.0리터(ℓ) 직렬 6기통 터보차저 엔진과 ZF 8단 자동변속기를 더하고 트랙맥 2단 트랜스퍼 케이스와 3개의 디퍼렌셜 기어를 엮었다. 또 상시 사륜구동 시스템과 솔리드 빔 액슬까지 얹었다.
이미 검증된 BMW의 엔진은 우리가 알던 느낌과는 조금 다르다. 최고출력을 286마력으로 낮추고 최대토크도 45.9킬로그램미터(㎏·m)로 제한했다. 그리고 최고 엔진 회전수도 낮게 묶어뒀다. 이는 엔진의 내구성을 높이고 최적의 토크로 오프로드 주행 성능을 끌어올리기 위한 선택이다.
의외의 온로드 주행 실력
차체에 뭍은 물과 진흙이 채 빗물에 씻기기도 전에 곱게 깔린 아스팔트 위를 달렸다. 사실 온로드 주행을 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승차감과 온로드 주행 감각쯤은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생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온로드 주행 감각 역시 그럴싸했다. 일반적인 승용차와 비교하기는 어렵지만 비슷한 오프로더와 비교하면 확실히 좋은 승차감을 전달했다.
고운 아스팔트 길을 달리다 다시금 임도에 접어들었다. 이번에는 1000미터(m)가 훌쩍 넘는 산 정상에 올라갈 순서였다. 다시 로우 기어를 물리고 서서히 굽이치는 산길을 타고 올랐다. 차창 너머로는 천 길 낭떠러지만 보일 뿐이었다. 사람 발길이 뜸한 산길은 여기저기가 움푹 패여 있었다. 물론 이때도 그레나디어는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레카로 시트는 부드럽게 몸을 감쌌고 서스펜션은 분주히 움직이며 노면을 대응했다. 산길을 오른 지 30분쯤 지났을 때 구름 속으로 접어 들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 험한 산길을 달리는 와중에도 노면을 놓치는 법이 없었다는 점에 놀랐다. 비에 젖은 흙길이었지만 노면을 놓치며 휠 스핀이 단 한차례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시 말하면 네 바퀴로 고르게 토크를 분배하고 노면을 꽉 붙들어 안전한 주행을 도왔다는 뜻이다.
투박하지만 불편하지 않은 실내
정상에 오른 후에서야 그레나디어의 속내를 살펴봤다. 대시보드 위에 자리한 12.3인치 디스플레이는 클러스터와 인포테인먼트 기능을 겸한다. 재미있는 점은 디스플레이의 구성이다. 오프로드 특화 모델답게 화면의 대부분은 기울어짐 정도, 오프로드 주행 정보가 차지하고 있었다. 엔진 회전수와 속도, 연비 등에는 3분의 1밖에 자리를 내어주지 않았다.
실내는 마치 과거 비행기 콕핏에 앉은 듯한 기분을 선사한다. 대시보드는 물론이고 머리 위에까지 버튼이 빼곡하다. 주행 상황에 따라 버튼을 조작해 최적의 주행 환경을 만드는 재미가 있다. 커다란 디스플레이에 버튼을 숨기는 요즘 차들과는 확실히 다르다. 또 선루프도 조수석과 운전석이 나눠져 있고 이 역시 수동으로 여닫는 방식이다.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은 스티어링 휠에 자리한 자전거 그림이 그려진 붉은 버튼이다. 이 버튼을 누르면 보행자 혹은 자전거를 탄 사람이 놀라지 않게 음량을 줄여 경적을 울린다. 참 재치있는 요소다.
물론 모든 점이 완벽한 것은 아니다. 섬세한 부분에서 약간은 아쉬움이 남았다. 이를테면 윈도 조작 버튼이다. 원터치로 윈도를 내리는 것은 가능하지만 올리는 것은 그렇지 않다. 버튼을 꾹 당기고 있어야 닫히는 방식이다. 원터치로 내리고 올리는 방식을 더했으면 어땠을까 싶다.
이네오스 그레나디어는 주머니가 여러 개 있고 오염에도 강한 아웃도어 기능성 옷과 같다. 그 어떤 환경에서도 승객을 보호하고 앞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언제부턴가 SUV, 오프로더는 패션카 영역으로 스며들고 있다. 보여주기식 오프로더에 불과하다는 얘기다. 하지만 이네오스 그레나디어는 그렇지 않다. 본질에 집중하며 숨겨진 모험심을 끌어낸다. 단언컨대 그레나디어는 멋지게 차려입은 옷을 벗어 던지고 기능에 충실한 아웃도어 룩을 완성하고 싶은 이들을 위한 진짜 오프로더다.
허인학 기자 ih.heo@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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