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 전문 기자로 활동하는 내내 전기차와는 담을 쌓고 살았다. 태생부터가 전기차와는 맞지 않는다는 게 기자의 신념이다. 누군가 전기차를 사겠다고 말을 꺼내기라도 하면 도시락을 싸 들고 다니며 말리기 바쁠 정도였다. 그런 기자에게 마지막 꿈은 내연기관 시대가 완전히 저물기 전에 근사한 V8을 손에 넣는 것이다.
이번에 캐딜락의 V8을 시승차로 선택한 이유도 그 때문이다. CT5-V 블랙윙은 기자가 상상하는 자동차와 똑 닮아 있다. 8개의 실린더에 숨을 불어넣는 과정부터가 설렘이고 V8 특유의 고동, 오직 뒷바퀴로만 흘러 들어가는 677마력은 신경회로를 망가뜨리며 아드레날린을 최고치로 쏟아지게 한다. 단언컨대 CT5-V 블랙윙은 지금껏 만나왔던 V8 세단 중 가장 맛있는 자동차다.
캐딜락은 알파벳 ‘V’를 통해 고성능을 향한 열망을 드러내 왔다. 모터스포츠에서 쌓은 노하우를 일상생활에 적합하도록 다듬어 V 시리즈에 욱여넣으며 자신들의 힘을 과시한 것이다. 그렇게 탄생한 V 시리즈들은 V8이라는 낭만을 품고 다운사이징, 전동화 시대에 맞서고 있다. 이번에 만난 CT5-V 블랙윙은 V 시리즈의 가장 최신작이자 선봉에 서는 모델이다.
가장 기본적인 요소인 직선으로 완성한 강렬함
CT5-V 블랙윙은 CT5의 매끈한 디자인 위에 고성능 V 시리즈의 겉옷을 입었다. 특히 정면에서 바라보는 인상이 대단히 매력적이다. 좌우에 배치한 펜더 벤트와 프론트 그릴은 완벽한 조화를 이루며 공격적인 인상을 완성한다. 개인적으로는 지금껏 만나왔던 V 시리즈 중 멋진 디자인의 옷을 입은 듯하다.
특히 카본 파이버 프론트 스플리터와 미드-바디 패널, 카본 파이버 리어 스포일러로 구성된 바디킷은 와이드하고 낮아 보이는 인상을 연출해 범상치 않은 힘을 모델임을 암시한다. 마치 사냥을 위해 납작 엎드린 맹수의 모습도 떠오른다. 이 요소들은 다운포스를 극대화하고 에어로 다이내믹을 최적화하는 역할도 담당한다. 시각적 즐거움과 주행 성능 동시에 챙긴 셈이다.
외관 곳곳에는 정체성을 드러내는 V 배지도 더해졌다. 특히 V 배지가 새겨진 CT5-V 블랙윙만을 위해 개발한 19인치 사틴 그라파이트 다크 알로이 휠과 브론즈 캘리퍼는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울 정도다.
CT5-V 블랙윙은 전장은 4945밀리미터(㎜)며 전폭과 전고는 각각 1885㎜, 1440㎜다. 휠베이스는 2947㎜다. 경쟁 모델로 삼고 있는 BMW M5보다 살짝 작긴 하지만 직선의 캐릭터 라인을 통해 완성한 강렬한 덕분에 비율 측면에서는 전혀 부족하지 않게 느껴진다.
후면에서는 캐딜럭 특유의 수직형 테일램프가 시선을 끌어당긴다. 거기에 트렁크에 더해진 카본 파이버 리어 스포일러와 디퓨져, 듀얼 타입으로 구성된 트윈 머플러 팁, V 배지는 과하지 않은 멋을 전달한다.
V 퍼포먼스의 정수를 보여주는 실내
도어를 열면 펼쳐지는 CT5-V 블랙윙의 실내는 완벽하게 고성능을 위한 구성으로 꾸며졌다. 화려함보다는 온전히 V 퍼포먼스를 느낄 수 있는 요소들로 가득 채웠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부분은 고유의 시리얼 넘버가 각인된 퍼포먼스 스티어링 휠이다. 일반 CT5 스티어링 휠과 달리 알칸타라를 두르고 있으며 중앙에는 붉은색 센터 스트라이프 포인트도 더했다. 특히 스티어링 휠 한쪽에 V 버튼을 마련해 손가락을 까딱하는 것만으로도 바로 V 모드로 바꿀 수 있다. 또 곳곳에 카본 파이버 가니시를 더해 고성능을 표현했으며 CT5-V 블랙윙 전용 계기판과 전용 기능까지 추가돼 고성능만의 특별함을 높였다.
아울러 V 시리즈 블랙윙 전용 퍼포먼스 버킷 시트도 적용됐고 앞좌석 마사지 시트, 차량 공기 질을 관리할 수 있는 에어 이오나이저, 16개의 스피커로 구성된 AKG 서라운드 오디오 시스템과 노이즈 캔슬링 기능도 적용돼 일상생활에서의 편의성을 한층 강화했다.
전체적인 구성과 디자인에는 불만이 없지만 실내 공간에 대해서는 약간 아쉬움이 남는다. 경쟁 모델로 꼽고 있는 BMW M5, 메르세데스-AMG E63 대비 공간이 넉넉지 않다. 특히 2열 공간은 M3 수준 정도다. 버킷 시트의 형상으로 무릎 공간이 살짝 좁다. 실내 공간만 따지면 M3 혹은 C 63 등과 경쟁하는 게 딱 맞지 않나 싶다.
V8, 슈퍼차저, 그리고 677마력이 주는 감동
CT5-V 블랙윙의 엔진에 숨을 불어넣자 8개의 실린더가 차례로 폭발했다. V8 특유의 고동 덕분에 심장 박동수가 치솟기 시작했다. 노멀 모드인 투어 모드에서도 힘이 대단하다. 가속페달을 톡하고 건드는 것만으로도 시트에 몸이 파묻히기 일쑤다. 뒷타이어를 노면에 비비며 흰 연기를 피우는 것쯤은 일도 아니다. 요즘 유행하는 전기차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감동이 느껴진다.
CT5-V 블랙윙이 품은 V8 심장은 6.2리터(ℓ) 핸드 빌드 슈퍼차저 엔진으로 캐딜락 역사상 가장 강력한 677마력, 91.9킬로그램미터(㎏·m)의 성능을 쏟아낸다. 그리고 이 힘은 오로지 뒷바퀴를 굴리는 데만 사용된다. 사실 700마력의 힘을 다스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자칫 잘못하면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는 그런 힘이다.
하지만 CT-5V 블랙윙은 움직임이 매우 안정적이다. 과하게 가속페달을 조작하면 엉덩이가 움찔거리기는 하지만 자세 제어장치를 끄지만 않는다면 아찔한 상황은 연출되지 않는다. 또 적당한 긴장감을 유지하게 해 운전하는 맛이 있다. BMW M5와는 확실히 다른 맛이 느껴진다. 게다가 슈퍼차저가 더해진 V8의 묵직하고 낮은 음색은 그 어떤 음악보다 아름답게 들린다. V8, 특히 슈퍼차저 V8에 열광하는 이유다.
무려 10단으로 쪼개진 변속기의 움직임은 매우 매끄럽다. 과거 V 시리즈의 경우 제자리를 찾지 못해 허둥거리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는데 CT5-V 블랙윙은 전혀 그렇지 않다. 가다서다를 반복하거나 패들 시프트를 이용해 바쁘게 기어를 바꾸는 상황에서도 전혀 당황한 기색을 보이지 않는다. 단 변속 속도가 빠른 편은 아니다.
어느 정도 CT5-V 블랙윙과 친해진 후 통행이 적은 도로를 찾았다. 677마력을 오롯이 느껴볼 참이었다. 주행 모드를 V 모드로 바꾸고 가속 페달을 과감히 밀어 넣었다. V8 심장은 미친 듯이 폭발하며 가진 힘을 삽시간에 쏟아냈다. 677마력, 91.9kg·m의 힘을 전달받은 뒷타이어는 엄청난 힘에 못 이겨 노면을 놓치는 모습도 보였다. 305㎜에 달하는 타이어 너비도 미국산 V8 파워를 온전히 받기에는 부족한 느낌이다. 미쉐린 파일롯 스포츠 컵 2 타이어를 신겼으면 어땠을까 싶다.
한참 동안 이리저리 꼬인 산길을 달렸다. 사실 미국산 V8 퍼포먼스를 완전히 느낄 수 있는 최적의 놀이터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실상은 달랐다. 앞머리를 코너 안쪽으로 밀어 넣자 칼 같은 움직임에 새삼 놀랐다. 이전까지 느껴왔던 미국산 고성능과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다. 와인딩 로드에 딱 어울리는 움직임이었다.
특히 차체는 어떤 상황에서도 뒤틀리는 느낌을 전달하지 않았고 4세대로 진화한 마그네틱 라이드 컨트롤 4.0(Magnetic Ride Control 4.0, MRC)의 능력은 그 어떤 차와 경쟁해도 뒤지지 않을 수준이다. 자성을 이용해 댐퍼를 조정하고 노면을 대응하는 MRC는 차를 과격하게 몰아붙이는 상황에서도 우직하게 차체를 받들었다. 또 카본 세라믹 브레이크는 쉽게 지치지 않고 일정한 제동 성능을 발휘했다. V8 엔진, 10단 변속기, MRC, 카본 세라믹 브레이크의 조합은 정말이지 일품이었다.
물론 이러한 짜릿한 감동을 얻기 위해서는 포기해야 할 부분이 분명히 있다. 바로 빠르게 비워지는 연료탱크다. 상황에 따라 엔진의 반쪽을 잠재우는 액티뷰 퓨얼 매니지먼트 시스템을 품고는 있지만 효율성은 극악무도하다. 마치 격한 운동 후 차가운 생수를 들이켜는 것처럼 연료를 빠르게 빨아들인다. 역시 세상에 두 마리 토끼를 완벽히 잡을 수 있는 건 없다. 왕좌에 오르기 위해서는 왕관의 무게를 견뎌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V8 마니아들은 CT5-V 블랙윙과 같은 고성능을 원한다. 엔진을 도려낸 자리에 과급기와 전기모터를 단 고성능은 그들의 취향과 맞지 않는다. 8개의 실린더가 폭발하면서 쏟아내는 677마력의 힘, 타이어를 미끄러트리며 흰 연기를 피우는 건 그 어떤 형용사로도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을 선사하기 때문이다.
CT5-V 블랙윙은 이 시대 마지막 V8 로맨티스트다. 다가오는 전기차 시대를 막을 수는 없겠지만 한 사람의 V8 마니아로서 영원히 V8이 존재하길 바랄 뿐이다.
허인학 기자 ih.heo@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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