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중앙처리장치(CPU) 시장과 메모리 반도체 시장의 맹주인 인텔과 삼성전자는 공교롭게도 같은 시기에 비슷한 곤경에 빠졌습니다. 공통점이 있다면 두 회사 모두 설계부터 제조 등 반도체의 모든 생산 과정을 담당할 수 있는 종합반도체기업(IDM)이며, 한때 세계 최고 수준의 반도체 제조 능력을 자랑했었다는 것입니다. 대만 TSMC를 추격하기 위해 무리하게 대규모 투자를 쏟아부었다가 전사적인 위기가 초래됐다는 것도 비슷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지난 16일(현지시각) 인텔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사업을 담당하는 인텔파운드리서비스(IFS)를 자회사로 분사한다는 계획을 밝혔습니다. 최근 업계에서는 인텔이 파운드리 사업을 매각할 것이라는 루머가 제기돼 왔지만, 인텔은 IFS를 자회사 형태로 운영하며 경영의 독립성을 부여한다는 방침입니다.
일각에선 꾸준히 매각설도 나오지만 IFS의 거의 유일한 대형 고객사가 인텔 설계사업부라는 점, 그리고 미국 정부가 자국 안보를 위해 첨단 칩 제조능력을 갖춘 자국 기업에 보호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현재로선 현실 가능성이 없어 보입니다. 앞서 미 정부는 애리조나 공장 지원금 명목으로 200억달러(약 26조6400억원)의 보조금과 대출을 인텔에 지원했으며, 군사용 반도체 개발·생산 프로젝트를 인텔에 맡기며 최대 30억달러를 추가로 지원한다고 밝혔습니다.
◇ 공룡이 된 IDM, 멸종기로 향하나
종합반도체기업(IDM)은 반도체의 설계, 테스트, 제조, 후공정 등 모든 반도체 생산공정을 단독으로 수행할 수 있는 거대 기업을 의미합니다. 인텔이 사실상 원조격이며, 메모리와 파운드리, 시스템LSI 3개의 별도 사업부를 거느린 삼성전자도 인텔과 함께 대표적인 IDM 중 하나로 꼽힙니다.
일각에선 인텔이 파운드리를 분사하기로 한 결정이 사실상 예견된 수순이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세계 최대 파운드리 기업인 TSMC가 부상하고, 모바일, PC, 서버 등 다양한 영역에 프로세서 설계 전문기업(팹리스)들이 날개를 펴기 시작한 2000년대부터 반도체 기업들은 덩치를 키우기보다는 각자의 전문 영역을 강화하는 ‘전문화의 시대’를 맞게 됐습니다. AMD, 엔비디아 등과 같은 기업들이 제조시설을 거느리지 않고 혁신적인 칩 설계에만 막대한 투자를 단행할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인텔이 변화하는 업계와의 경쟁에 뒤처지기 시작한 건 꽤 오래전입니다. AMD 등 경쟁사가 TSMC를 활용해 14나노 공정에 이어 10나노, 7나노에 진입했던 2010년대 인텔은 뒤처진 제조 기술력 때문에 14나노에 수년간 머무르는 실책을 범합니다. 인텔을 암흑기로 몰아넣은 브라이언 크르자니크 전 최고경영자(CEO)의 재무중심주의적 경영이 가장 큰 문제였지만, 팹리스에 비해 시장 트렌드에 민첩하게 반응하지 못하는 거대하고 관료주의적인 IDM 문화가 장애물로 작용했다는 평가가 나옵니다.
점점 다양화하는 IT서비스 산업에 맞춰 반도체의 용도가 복잡다단해지고 있는 가운데 IDM이 모든 섹터에 직접 대응하기엔 반도체 업계가 다양화, 전문화됐다는 근본적 문제도 있습니다. 설계, 제조, 패키징 등 연구개발(R&D) 투자 범위가 점점 늘어나고 각 분야의 경쟁자들은 점점 늘어나기 시작하면서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전선’이 넓어진 것입니다.
크르자니크 전 CEO 해임 이후 VM웨어 CEO였던 팻 겔싱어를 CEO로 데려온 인텔은 이 같은 IDM의 구조적 약점을 인지하고 ‘IDM 2.0′이라는 슬로건을 내걸었습니다. 인텔이 파운드리 사업부문을 분사하거나 완전히 독립적인 회사로 내보내야 한다는 안팎의 의견이 제기되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부터니 사실 인텔의 파운드리사업 분사는 완전히 새로운 얘기는 아닙니다.
표면적으로 인텔이 자금난과 회사 운영의 어려움으로 파운드리 사업을 포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미국 외신을 비롯한 전문가들은 오히려 인텔이 무분별하게 확장된 사업 영역과 투자 부담을 낮추고, 다시 CPU와 인공지능(AI) 칩 설계에 집중할 수 있는 터닝 포인트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게다가 같은날 미국 정부의 대규모 보조금을 수령한 것은 미 정부가 자국의 칩 제조 경쟁력의 대표 주자로 인텔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셈이며, 어떤 식으로든 인텔을 위해 혈세를 투입할 의지가 있다고 보여준 것입니다. 그동안 하이-NA EUV 노광장비 등 대당 약 4000억원을 호가하는 초고가 장비 투자로 재정건전성이 악화된 인텔은 제조 관련 투자 부담이 줄어들면서 다시 설계 및 개발에 선택과 집중을 할 수 있게 됐습니다.
◇ 믿을 구석 있는 인텔… 기댈 곳 없는 삼성
위기인 건 삼성전자도 마찬가지이지만 앞으로의 상황은 더 녹록지 않습니다. 메모리 분야에서는 SK하이닉스와 마이크론, 파운드리에서는 TSMC, 모바일칩 설계 분야에서는 퀄컴, 애플 등 강력한 상대와 경쟁하고 있는 삼성전자 역시 제한된 투자 자원을 너무 많은 영역에 분산하면서 모든 사업이 흔들리고 있는 상황입니다. 각 분야의 기술 고도화로 인해 설비투자 비용, R&D 역량 확보, 인재 부족 등 문제가 터져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인텔이 뒤늦게라도 구조조정을 통해 과포화된 임원진을 정리하고, 관료주의에 쩌든 조직문화 개선에 나선 것은 삼성 역시 이 과정을 피할 수 없다는 얘기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실제 삼성전자는 예상치 못했던 메모리 초호황기에 취해 관료화된 조직문화와 지나치게 비대해진 임원진을 정리할 시기를 놓쳤고, 이는 새로운 업계 트렌드에 맞춰 빠르게 변화하는 시기에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미국과는 달리 한국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도 기대하기가 어렵습니다. 인텔의 위기에 대해 국내외 미디어에서 집중 보도를 하고 있지만, 사실 인텔은 그렇게 쉽게 쓰러질 기업이 아닙니다. 기업이 보유한 근본적인 경쟁력을 떠나 미국 정부 입장에서 인텔은 미국 반도체 산업의 전통적인 상징이나 다름 없는 기업입니다. 정치적으로도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미 정부가 반도체과학법(칩 액트·CHIPS Act)을 내세우며 인텔에 아낌없는 지원을 쏟아주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인텔이 정말 쓰러질 위기에 놓여도 미 정부가 수수방관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반면 삼성은 다른 입장입니다. 정부의 지원은 커녕 오히려 정부 정책에 삼성이 지갑을 열어야 하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입니다. 반도체업계 관계자는 “같은 IDM이라도 삼성은 인텔보다 더 어려운 상황”이라며 “인텔의 경우 강력한 미국 정부의 지원과 파트너십을 등에 업고 있으며, 최선단 공정 시설을 미국 내에 유치하려는 정부 의지도 강하다”고 했습니다. 그는 이어 “삼성의 경우 이렇다할 정부 지원 없이 혼자 독자생존해야 하는 상황이며 인텔 파운드리가 자체 생존을 위해 각국 팹리스의 레거시(성숙공정) 제품을 겨냥하며 ‘파이 싸움’을 걸어올 것이기 때문에 불안 요소만 더 커졌다”고 설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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