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좋지 않아요? 운전하기가 매우 편해요. 운전하는 맛도 뒤에 타는 맛도 있어요”
지금으로부터 6년전 2세대 K9 시승회에서 선배 기자와 나눈 대화다. 그 이후로 K9은 운전하기 좋고 가성비 좋은 플래그십 세단으로 기억되어 왔다.
그리고 지금, 한 번의 부분변경과 연식 변경을 거친 K9을 마주했다. 새로워진 모습의 K9이 시야에 들어오자 과거의 기억이 떠올랐다. 운전석에 올라 스티어링 휠을 잡기도 전부터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번졌다. 그리고 한 편으로는 숱한 플래그십 세단을 경험했던 터라 과거와 달리 K9을 대하는 시각이 높아지지 않았을까 하는 걱정스러운 부분도 있었다. 설렘과 걱정이 한데 섞여 오묘한 감정을 만들어냈다. 기아 K9은 여전히 좋았을까?
우아한 품격이 느껴지는 인상
기아는 풀체인지, 그리고 부분변경을 통해 기존과 완전히 다른 인상을 완성했다. 2세대 모델은 부드러움과 품격이 드러나는 디자인이었다. 하지만 풀체인지급의 부분변경을 거치면서 전면 인상은 완전히 달라졌다. 둥그스름했던 헤드램프는 길쭉한 형태로 변했고 대형 라디에이터 그릴에 적용됐던 V 형상의 크롬 패턴을 수평 형태로 변경했다. 세련미가 높아졌다.
측면의 변화는 찾아보기 힘들다. 여느 플래그십 모델처럼 허리가 길며 기존 K9이 가지고 있던 안정감 있는 라인은 그대로 유지했다. 가장 큰 변화를 찾으라면 휠 디자인이다. 연식 변경을 통해 19인치 다크 스퍼터링 휠이 새롭게 적용되었는데, 한층 더 역동적이면서 검은색의 깊이감이 느껴진다.
후면은 자동차에게 있어 매우 중요한 요소다. 뒤따르는 차의 운전자의 시선이 가장 많이 머무르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완성차 브랜드들은 엠블럼과 차명, 트림 등을 표현하는 레터링을 안정적인 위치에 놓는다. 그리고 수직 요소보다는 가로 요소를 통해 차체를 넓어 보이게 하고 안정감을 더하는 방식으로 디자인한다.
K9 역시 이를 잘 따르고 있다. 트렁크를 가로지르는 수평형 램프가 그것인데, 차체가 안정적이며 넓어 보이는 효과를 낸다. 또 수평형 램프와 범퍼 하단에 적용된 가로 크롬 요소 역시 안정감을 높인다. 레터링은 간결하다. 기아의 신규 엠블럼은 트렁크 중앙에 위치하며 차명과 네바퀴굴림을 뜻하는 4X 배지는 양 끝으로 배치됐다.
간결함이 묻어나는 실내
방정맞은 왕은 없다. 플래그십 역시 마찬가지다. 정상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서는 그에 맞는 품위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 이를테면 안락함이다. 플래그십 세단은 어떠한 주행 환경에서도 승객의 불편함을 최소화해야 한다. 또 외부 소음을 철저하게 차단해야 하며 차고 넘치는 기능까지 품고 있어야 한다. K9은 이런 플래그십의 조건을 모두 만족한다. 이 같은 면모는 실내에서 잘 드러난다.
실내는 간결한 구성이다. 화려하게 멋을 부리기보다 기본에 충실한 느낌이다. 다소 올드한 느낌이 풍기긴 하지만 나쁘지 않다. 시트의 가죽 질감은 부드럽고 몸을 감싸는 느낌이 좋다. 여기에 공기 주머니를 통해 운전 자세를 교정하고 피로도를 낮춰주는 에르고 모션 시트가 더해져 장거리 주행에도 큰 불편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14.5인치 와이드 디스플레이는 시인성과 사용성 모두 좋은 편이다. 특히 터치 기능을 지원하는 동시에 콘솔에 위치한 컨트롤러로도 작동이 가능하다. 무엇보다 사용 빈도가 높은 기능을 제어하는 물리 버튼이 마련되어 있는 점은 높은 점수를 줄 만하다. 최근 디스플레이의 크기가 거치면서 물리 버튼이 사라지고 있는 추세지만 K9은 그렇지 않다. 큼지막한 버튼이 자리하고 있어 주행 중에도 쉽게 기능을 제어할 수 있다. 또 손을 가져다 대면 해당 부위의 조명이 밝아지는 기능도 품고 있다.
핵심은 2열이다. K9의 2열 시트는 착좌감이 높다. 등부터 허리까지 감싸는 시트 형상 덕분에 장거리 이동에도 불편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또 리클라이닝 기능도 포함되어 있어 보다 편안한 자세로 앉는 게 가능하다.
2열에서는 엔진의 소음이나 진동 등이 잘 느껴지지 않는 편이다. 다만, 제네시스 G90과 비교하면 엔터테인먼트 기능이 부족하다. 또 휠베이스가 G90 대비 75밀리미터(㎜) 짧은 탓에 2열 공간이 여느 플래그십 모델처럼 여유롭지는 않다.
쇼퍼드리븐과 오너드리븐 모두 즐거운 움직임
앞서 설명했던 것처럼 K9은 운전석과 뒷좌석에서 모두 즐거운 차다. 이번에도 역시 그랬다. 직접 가속페달을 밟고 스티어링 휠을 돌리는 것도 2열에 편안히 앉아 드라이빙을 즐기는 것 모두 만족스러웠다.
스타트 버튼을 누르자 3.8리터(ℓ) V6 엔진은 부드럽게 잠에서 깼다. K9은 잠투정 없는 아이처럼 엔진 소음과 진동을 실내로 전달하지 않았다. 마치 움직일 준비가 됐다고 속삭이는 듯했다. 기어를 물리고 가속 페달을 밟고 있는 와중에도 부드러움은 이어졌다. 여러 차종을 통해 내구성과 성능을 입증받은 엔진은 나무랄 곳이 없었다. 8단으로 쪼개진 변속기 역시 투정 부리는 일이 없었다.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해냈다. 기어를 바꿔 무는 게 부끄러운 것인지 단 한 차례도 티를 내지 않았다.
이는 전방 예측 변속 시스템(PGS) 덕분이다. 이 시스템은 내비게이션 정보와 전방 레이더 및 카메라 신호를 활용해 가속과 감속 상황을 예측하고 미리 최적의 기어로 변속하는 기술이다. 이를테면 굽잇길, 내리막길, 과속 카메라, 과속 방지턱 등을 통과하기 전에 미리 기어를 내려 주행 안정성을 높인다. 또 앞차와의 거리를 유지할 수 있도록 변속하고 고속도로 진입 시에는 가속 성능을 높여주기도 한다.
스티어링 감각은 여유롭다. 역동성을 강조한 모델과 완전히 다른 성격이다. 움직임이 다급하지 않고 빠르게 이리저리 스티어링 휠을 휘감아도 당황한 기색을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움직임 덕분에 덩달아 여유로워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렇다고 힘이 부족한 것은 아니다. 주행 모드를 스포츠로 바꾸자 스피커에서는 가상의 엔진음을 흘려보냈다. 6개의 피스톤은 힘차게 움직이며 315마력의 최고출력과 40.5킬로그램미터(㎏·m)의 힘을 쏟아냈다. 차고 넘치는 힘은 2톤이 넘는 무게를 깃털처럼 가볍게 만들었다. 플래그십 세단이 이토록 잘 달릴 수 있다는 점은 분명한 매력이다.
노면을 대하는 자세 역시 출중하다. 서스펜션은 차체를 움켜쥐고 노면 충격이 승객에게 전해지지 않도록 위아래로 열심히 움직였다. 덕분에 자잘한 진동이나 과속 방지턱, 패인 길 등에서도 엉덩이로 충격이 전달되지 않았다. 후륜 서스펜션 움직임은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일반적으로 전륜에 비해 후륜의 경우 요철 통과 시 약간은 투박함이 느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K9은 프리뷰 전자제어 서스펜션을 통해 전방 노면에 적합하도록 서스펜션을 제어해 네 바퀴가 모두 요철을 통과할 때까지 부드럽게 움직였다. 플래그십의 자질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K9의 부드러움에 취해 연료 탱크에 바닥이 드러날 때까지 달렸다. 해는 뉘엿뉘엿 넘어가기 시작했고 석양은 찬란하게 K9을 비췄다. 하루 종일 K9과 함께하면서 플래그십에 대한 기준이 무너졌다. 무조건 값비싼 것이 제대로 된 플래그십이 아닐 수 있다는 점 때문이다.
물론 제네시스 G90 혹은 메르세데스-벤츠 S-클래스 보다 부족한 부분이 존재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1억원이 넘지 않는 가격표를 생각하면 K9은 훌륭한 선택지가 아닐 수 없다.
K9에 대한 인식은 더욱 확고해졌다. K9은 분명 운전석을 남에게 넘기고 싶지 않은 플래그십 모델이다.
허인학 기자 ih.heo@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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