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생 끝에 낙이 온다’, ‘쥐구멍에도 볕 들 날 있다’, ‘우물을 파도 한 우물만 파라’. 이 속담 의미는 누구나 알고 있다. 무슨 일이든 끝까지 물고 늘어지면 성공하기 마련이라는 얘기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북유럽에서 건너온 볼보를 가장 잘 설명하는 표현이다.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고 왜건이라는 우물을 파는 데 집중한 볼보는 ‘왜건의 명가’라는 별명을 얻었다. 볼보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면 누구나 들어본 말이다. 왜건을 향한 볼보의 뚝심은 한국에서도 통했다. ‘왜건의 무덤’이라고 불리는 탓에 다른 브랜드들은 서로 눈치만 보고 있었다. 섣불리 도전할 엄두를 내지 못한 것이다. 몇몇 브랜드가 왜건을 내놓긴 했지만 차디찬 냉대에 버티지 못하고 슬그머니 발을 뺐다.
하지만 볼보는 달랐다. 아니, 조금 다른 방법을 택했다고 하는 게 맞는 표현이다. 왜건에 SUV 특성을 살짝 곁들인 ‘크로스컨트리’를 카드로 꺼내 든 것이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90과 60 클러스터에 크로스컨트리를 투입하면서 왜건에 대한 인식을 바꾸기 시작했다. 특히 V60 크로스컨트리는 출시와 함께 성공 가도를 걷기 시작했다. 성공의 이유는 V60 크로스컨트리를 마주하는 순간 명확하게 드러났다.
올드함? 시간이 흘러도 매력적인 인상
V60 크로스컨트리는 지난 2018년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등장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2019년 한국 땅을 처음 밟았다. 사실 5년이라는 시간은 무엇이든 질리게 만들기 충분하다. 하지만, 볼보의 디자인은 그렇지 않다. 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질리지 않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서 소소하게 변화를 거치긴 했다. 그렇지만 큰 틀은 변하지 않았다.
전면에는 모두가 아는 볼보의 아이언 마크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리고 양옆으로는 흔히 토르의 망치라 불리는 T자형 주간주행등이 포함된 헤드램프가 안정감을 높인다. 범퍼에는 날카롭게 잘린 듯한 캐릭터 라인을 더해 역동적이면서 다부진 인상을 완성했다.
측면은 영락없는 왜건의 모습이다. 투-박스 형태의 특징이 드러나는 측면에는 과한 기교를 부린 요소가 없다. 볼보 특유의 차분한 분위기가 풍기는 이유다. 측면에서는 일반 V60과 크로스컨트리의 차이를 알 수 있다. 바로 최저지상고다. 일반 V60 대비 크로스컨트리는 75밀리미터(㎜) 높다. 덕분에 약간의 오프로드 주행, 승하차 편의성 등에서 이점을 챙겼다. 또 오프로드 주행을 염두해 돌부리 혹은 나뭇가지 등으로부터 차체를 보호하기 위해 검은 플라스틱 가니시를 둘렀다. 마음 놓고 험로를 달릴 수 있는 이유다.
후면은 아쌀하게 예쁘고 정갈하다. 특히 D 필러를 따라 흐르다 트렁크 안쪽으로 파고드는 볼보 특유의 ㄴ자 테일램프를 비롯해 레터링 등에서는 뛰어난 균형감이 느껴진다. 또 범퍼 하단에는 ‘CROSS COUNTRY’ 각인을 더해 일반 왜건과는 다른 태생임을 드러내고 있다.
스칸디나비아의 정수, 익숙함에서 전해지는 안정감
실내는 여느 볼보와 비슷한 구성이다. 2세대 XC90을 시작으로 V90 크로스컨트리, XC60, S60 등에서 숱하게 경험했지만 질리지 않는다. 향후 몇 년간은 더 이 구성을 유지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밝은 브라운 톤의 가죽과 원목 재질의 가니시는 차분한 분위기를 선사한다.
특히 실내에는 볼보가 한국 시장에 대한 애정이 잘 드러나 있다. 300억원을 들여 한국 시장만을 위해 ‘티맵 오토’와 차량용 AI ‘누구 오토’, 음악 스트리밍 서비스 ‘플로’를 통합한 시스템을 개발했는데, 쓰임새가 아주 좋다. 돈을 들인 보람이 있다. 순정 내비게이션과 연동되는 헤드업 디스플레이는 물론이고 계기판 덕분에 쉽게 정보를 파악할 수 있다. AI 누구 오토도 말귀를 꽤 잘 알아듣는다. 물리 버튼을 최소화했지만 불편함이 없는 이유다. ‘아리아’를 불러 실내 온도를 조절하는 것은 물론 다양한 기능을 말 한마디로 제어할 수 있다.
시트의 형상 역시 좋다. 운전석을 비롯해 모든 시트는 탑승자의 몸을 부드럽게 감싼다. 부드러운 가죽 질감은 만족도를 높이는 데 힘을 보탠다. 적당히 단단한 쿠션감과 구성 덕분에 장거리를 주행해도 피로도가 많이 쌓이지 않는다.
이 외에도 오레포스사의 크리스탈 기어 레버는 마치 고급 와인잔을 만지는 느낌이다. 귀를 즐겁게 하는 바워스앤윌킨스 사운드 시스템은 빼놓을 수 없는 자랑거리다.
2열 공간은 경쟁 모델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편이다. 1열 시트를 B 필러에 맞추면 무릎 공간도 넉넉하고 머리 공간도 부족함이 없다. 다만, 2열 도어 개구부가 조금 작은 듯하다. 일반적으로 V60 크로스컨트리는 패밀리카로 쓰이는 경우가 많은데, 2열에 카시트를 장착하고 아이를 태우고 내릴 때 조금은 불편함이 느껴질 수준이다.
트렁크 용량은 529리터(ℓ)로 경쟁 모델보다 조금 앞선다. 용량도 용량이지만 직사각형 형태 덕분에 꽤 많은 짐을 적재할 수 있다. 2열 시트를 접으면 더 많은 짐을 삼키기도 한다.
4개의 피스톤으로 완성한 호쾌한 달리기 실력
이번에 시승한 볼보 V60 크로스컨트리는 기다란 보닛 아래 2.0ℓ 직렬 4기통 가솔린 엔진을 두고 마일드 하이브리드 시스템을 더한 B5 모델이다. 현재 판매되고 있는 다른 볼보 모델과 같은 구성이다.
스타트 버튼을 비틀자 엔진이 깨어나며 약간은 걸걸한 음향을 내며 4개의 피스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솔린 엔진치고는 약간은 소음이 있는 편이다. 경쟁 모델인 BMW 320i 투어링 대비 소음과 진동이 큰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가속페달을 밟고 바퀴를 굴리는 순간 소음과 진동에 대한 불만은 눈 녹듯 사라진다. 엔진 소음이 실내로 파고들지 않는 까닭이다.
무엇보다 출력에 대한 부족함이 없다. V60 크로스컨트리의 최고출력은 250마력으로 320i 투어링보다 월등히 앞선다. 넉넉한 출력은 호쾌한 달리기 실력으로 이어진다. 가속페달을 끝까지 밟아 엔진을 팽팽히 돌리면 250마력과 35.7킬로그램미터(㎏.m)의 토크가 네 바퀴로 전달되며 빠른 속도로 계기판 속 숫자를 바꾼다.
8단 자동변속기의 능력도 좋다. 변속 속도가 빠르지는 않지만 최대한 부드럽게 기어를 바꿔 주행을 방해하지 않는다.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도심에서도 부드러움을 잃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정체가 심한 구간에서는 1단과 2단, 3단을 번갈아 사용하는 데 단 한 차례도 충격이 느껴지거나 제자리를 찾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서스펜션의 감각은 부드럽다. 스포츠성을 띄는 320i 투어링과 확실히 반대 성향이다. 한식구인 S60과 비교해도 부드러운 편이다. 서스펜션의 상하운동의 폭이 넓은 느낌이다. 덕분에 주행이 느껴지는 피곤함이 적다. 2열에서의 승차감 역시 경쟁 모델 대비 부드럽게 설정됐다. 요철을 넘을 때 후륜 서스펜션이 의연하게 대처해 통통 튀는 느낌을 전달하지 않는다. 패밀리카로서의 요건을 충족한 셈이다.
수차례 볼보 V60 크로스컨트리를 경험한 결과, 답은 명확했다. 웰메이드 왜건이라는 사실이다. 왜건이 살아남기 힘들다는 척박한 한국에서 뿌리를 내릴 수 있었던 이유다. 왜건과 SUV의 장점을 한데 모은 크로스컨트리는 또 하나의 장르가 되어버린 느낌이다. 단언컨대, 국내에서 디자인, 승차감, 성능, 공간성 등 모든 것을 갖춘 왜건은 오직 V60 크로스컨트리뿐이다.
허인학 기자 ih.heo@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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