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기능을 하는 수많은 제품들 사이에서 차별점은 ‘디테일’에서 나온다. 이러한 차별점은 명품 같은 영역에만 해당되지 않는다. 우리가 일상을 함께 하는 PC나 각종 전자제품에서도 흔히 찾아볼 수 있는 부분이다. 의외로 디테일과 거리가 있을 것 같은 데스크톱 PC에도 챙기는 사람만 챙긴다는 세심한 디테일이 있다. 바로 PC 내부의 ‘선정리’다. 때로는 얼마나 선을 깔끔하게 정리하느냐에 따라 PC 조립의 실력과 성의를 가늠하기도 할 정도다.
예전에는 PC 내부의 선정리가 하면 좋고 안해도 그만인 그런 존재였다. 깔끔하게 선정리를 해 두면 보기도 좋고 내부의 공기 흐름에도 도움이 될 수 있지만, 일단 번거롭고 잘 보이지도 않는 위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내부가 잘 보이는 강화유리와 어항형 케이스가 유행하면서 PC 내부의 ‘비주얼’이 중요해졌다. 내부 선정리 기술은 비주얼을 완성하는 마지막 기술 같은 의미가 됐다.
이러한 ‘선정리’에 대한 집념은 아예 물리적인 폼팩터의 변화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에이수스와 MSI, 기가바이트 등 주요 메인보드 제조사들이 각자의 방법으로, 메인보드에 연결되는 케이블 연결 단자들을 메인보드 뒷면으로 옮기는 ‘후면 배선’을 실험적으로 선보이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변화는 메인보드만의 변화가 아니라, 케이스, 그래픽카드 등과 플랫폼 생태계 수준에서 함께 바뀌어야 할 부분이다.
메인보드 뒷면에 주요 커넥터 배치, 전면의 ‘깔끔함’ 장점
지금까지 거의 모든 PC용 메인보드는 주요 부품과 케이블의 연결을 메인보드의 ‘상면’에 배치했다. 이는 어찌 보면 ‘고정관념’ 처럼 이어져 온 부분으로, 지금까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를 바꿀 이유를 크게 찾지 못했다. 메인보드가 케이스의 한쪽 가장자리에 고정되는 만큼 후면을 활용하기 여의치 않았던 측면도 있다. 그래픽카드 크기가 커지면서 이와 중첩되는 위치의 케이블들은 메인보드 측면으로 연결하는 변화가 있기도 했는데, 측면 배치의 경우 탈착시 내구성 등에서 다소 주의가 필요한 경우도 있다.
최근에는 PC 내부에서 프로세서와 그래픽카드의 발열량이 커지고, 측면에 아크릴이나 강화유리를 장착해 내부가 보이는 케이스가 유행을 타게 되면서, 쿨링 효율과 미관상 케이블 정리에 대한 요구도 높아졌다. 이 때 가장 기본적인 케이블 정리 방법은 케이블을 모서리 공간이나 뒷쪽 공간으로 잘 ‘숨기는’ 것이다. 이에 최근의 케이스들은 수월한 선정리를 위해 메인보드 후면이나 측면, 하단 등에 선을 수납할 수 있는 공간을 남기는 게 기본이 됐다.
메인보드의 ‘후면 배선’ 설계는 이러한 ‘선 숨기기’를 설계 단계까지 적용한 것이다. 메인보드의 24핀 ATX 전원 케이블과 12V 보조전원 케이블, 케이스의 USB 포트나 스위치, LED들과 연결되는 케이블들을 전부 뒤로 옮겨서, 전면에는 부품들만 남겨 보기에도 깔끔하게 만드는 게 가장 큰 특징이다. 별도로 선정리를 하지 않아도 전면이 깔끔해지는 만큼, 내부가 보이는 데스크톱 PC에서 사용자들의 만족도가 더 높아진다.
이 설계는 미관적인 부분 뿐 아니라 기능과 성능 측면에서도 장점을 기대할 수 있다. 일단 전면에서 커넥터들이 각종 부품들과 자리 다툼을 할 필요가 없고, 약간이나마 메인보드의 다층 PCB 설계에서도 복잡성을 줄일 수 있다. 사실 이 ‘후면 배선’의 장점은 최신 반도체 공정에서의 ‘후면 전력공급 기술’과도 비슷한 모습인데, 결국은 지금까지 사용하지 않았던 영역을 사용해 여유를 확보하는 것이 핵심이다.
아직은 각 제조사별 종속성 뚜렷한 ‘비표준 규격’
현재 이 ‘후면 배선’ 설계를 사용한 제품군은 에이수스의 BTF(Back to the future), MSI의 ‘프로젝트 제로(Project Zero)’, 기가바이트의 ‘프로젝트 스텔스(Project Stealth)’ 등이 있으며, 이미 이를 적용한 일부 제품군들이 등장하고 있다. 3사 모두, 이 후면 배선 설계를 적용한 제품은 모델명에서부터 확실하게 구분이 가능한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이 중 에이수스의 BTF 제품군은 주요 전원과 입출력 관련 커넥터의 위치 선정에서 ‘기존 위치의 반대편’에 배치한 면이 눈에 띈다. 이는 기존 제품의 설계 변경 등에서 유리한 방법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일부 커넥터의 위치와, 기존에는 메인보드에 없던 PCIe 보조전원 입력이 생긴 점이 눈에 띈다.
에이수스의 경우 BTF 지원 전용 그래픽카드와 메인보드를 조합할 때, 그래픽카드의 보조전원을 메인보드를 통해 받을 수 있어 케이블 노출을 최소화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전용 설계는 에이수스의 BTF용 그래픽카드에서만 지원된다. 쿨러 연결의 경우 기본적으로 ‘일체형 수랭’에 맞춰 설계돼, 공랭식 쿨러의 경우 쿨러 전원 연결을 위한 연장선 등이 필요할 수도 있다.
한편, 이러한 시장 초기의 전용 규격은 시장 내에서 표준화되지 않은 것이고, 당연히 다른 제조사들과의 호환성은 기대하기 어렵다. 또한 때로는 세대간 호환성도 기대하기 어려워, 향후 업그레이드에서도 어려움을 겪을 수 있음을 감안해야 한다. 하지만 이러한 ‘제조사 종속성’을 모두 고려해도 매력이 더 크다고 생각하면, 과감히 모험가로의 여정을 선택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케이스 호환성 과제, 호환성 확보 자체는 ‘어렵지 않을 것’
후면 배선 설계의 메인보드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이 설계에 맞춘 케이스가 필요하다. 주요 배선 연결부가 메인보드 뒷면에 있는 만큼, 메인보드 뒷면에도 케이블을 연결할 수 있는 일정 수준 이상의 공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원칙적으로는 제조사별로 이러한 설계를 위한 ‘전용 케이스’가 있지만, 다들 기본적으로 ATX 규격의 변형인 만큼 주요 제조사의 설계에 두루 호환 가능한 서드파티 케이스들도 나와 있다.
이러한 ‘서드파티’ 케이스들의 설계에서 핵심은 ‘충분한 후면 공간’이다. 특히 제법 두꺼운 ATX 전원 케이블과 보조전원 케이블들, USB 3.2 케이블 등이 안전하게 설치되기 위해서는 제법 여유있는 공간이 필요하고, 이는 케이스 폭을 넓히는 요인이 된다. 단순히 기존 케이스에서 메인보드 장착 위치를 조금 조절하는 정도로는 대응이 쉽지 않지만, 듀얼 챔버 디자인 기반이라면 상대적으로 대응이 쉬워지는 모습이다.
서드파티 케이스 업체들의 고민으로는 후면 공간 확보와 함께, 제조사별 커넥터 위치가 모두 다른 데서 오는 설계의 난해함이 꼽혔다. 국내 케이스 제조 업체 관계자는 “현재 각 메인보드 제조사별로 커넥터의 위치가 모두 다른 상황이다. 또한 USB 3.2 케이블 등 두꺼운 케이블의 경우 장착이 단순하지 않은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이런 문제는 메인보드와 케이스, 그리고 파워 서플라이 제조사 등이 모두 모여 해결책을 찾아야 할 것으로도 보인다.
한편, PC 업계에서는 이러한 ‘후면 배선’ 설계가 올해 하반기부터 본격적으로 선보이기 시작해 내년 상반기 정도가 되면 시장에서 어느 정도 의미있는 수준의 위치에 이를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현재 일반 제품에 비해 다소 높은 가격도 시장 크기에 따른 부분으로, 시장에서 비중이 높아지고 물량이 늘어나면서 격차가 줄어들 것이라는 예상이다. 이에 따라, 고급형 게이밍 PC 시장에서부터 점차 보급이 본격화될 것으로 기대된다.
권용만 기자 yongman.kwon@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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