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 전기차 시대가 열리면서 내연기관을 탑재한 자동차들이 서서히 전기차에게 하나둘 자리를 내주고 있다. 내연기관 성애자들에게는 전기차의 등장이 그다지 반갑지 않을 것이다. 지금 이 시승기를 쓰고 있는 기자 역시 그렇다. 한 명의 내연기관 성애자로서 전기차는 그저 ‘바퀴 달린 컴퓨터’ 혹은 ‘움직이는 가전제품’에 불과했다.
하지만 기아 EV3를 경험하면서 전기차에 대한 인식이 점차 바뀌기 시작했다. 전기차도 충분히 매력적일 수 있고 가치가 충분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눈에 보이지 않던 벽이 허물어졌다. 서울에서 속초로 향하는 내내 EV3에게 스며들고 말았다.
작지만 당당한 디자인, 안정적인 비율이 인상적
EV3는 기아의 디자인 철학인 ‘오퍼짓 유니티드(Opposites United)’를 바탕으로 완성된 당당한 디자인이 특징이다. 전면 후드와 범퍼는 둥글고 매끄럽게 연결해 특유의 볼륨감이 돋보인다. 여기에 기아의 스타맵 시그니처 라이팅과 수직으로 떨어지는 헤드램프를 통해 타이거 페이스(Tiger Face)를 완성했는데, 대형 전기 SUV인 EV9이 연상될 정도로 존재감이 뛰어나다.
개인적으로는 측면 디자인이 가장 마음에 든다. 안정감이 느껴지는 비율은 물론이고 후면으로 갈수록 낮아지는 루프라인은 역동적인 분위기까지 감돌게 한다. 또 휠 하우스 위쪽에 굵은 캐릭터 라인을 더해 볼륨감을 한층 강조한 모양새다. 휠 하우스를 가득 채우는 휠의 디자인은 기하학적인 느낌을 전달한다.
후면 디자인 전면과 달리 직선이 강조된 모습이다. 일반적으로 후면부는 뒤따르는 차가 오래 지켜보게 되는 부분이다. 때문에 후면에 브랜드명과 차 이름을 글자로 새기는 경우가 많은데, 자칫 잘못하면 이로 인해 복잡해 보일 수 있는 위험이 있다. 하지만 EV3는 기아 특유의 디자인 요소를 적재적소에 배치해 단단하면서 안정감 있는 인상을 완성했다.
시승차의 경우 EV3 GT 라인으로 곳곳에 전용 디자인 요소를 더해 강인하고 역동적인 분위기를 강화했다. 이를테면 범퍼 하단부다. 차체와 연결되는 날개 형상을 범퍼 밑부분에 더했고 후면 범퍼 하단에는 수평형 리어 리플렉터를 적용했다. 휠 역시 GT 라인 전용 디자인이 적용돼 있어 특별함을 선사한다.
작지만 작지 않은 실내, 신경 쓴 티 드러나
도어 핸들을 당겨 실내로 들어서면 간결하고 효율적인 공간이 펼쳐진다. 먼저 12.3인치 클러스터와 5인치 공조, 12.3인치 인포테인먼트 시스템 등 세 개의 화면이 하나로 연결된 파노라믹 와이드 디스플레이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간결한 정보와 시인성이 뛰어난 GUI(Graphic User Interface,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 디자인이 매력적이다.
다만, 가운데 위치한 5인치 공조 디스플레이는 효용성이 떨어지는 모습이다. 위치 탓에 스티어링 휠에 가려 정보가 쉽게 눈에 들어오지 않으며 터치 조작을 위해 손을 뻗으면 와이퍼 조작 레버에 손이 걸리기 십상이다. 차라리 센터 디스플레이 밑부분에 위치한 물리 버튼으로 조작하는 게 속이 편할 정도다.
마음에 걸리는 부분은 또 있다. 바로 컵홀더의 위치다. EV3는 세계 최초로 최대 120밀리미터(㎜)까지 확장할 수 있는 슬라이딩 콘솔 테이블을 적용했다. 이로 인해 정차 중이나 휴식 시 다양한 용도로 활용할 수 있지만, 공간 확보를 위해 컵홀더를 플로어 쪽에 배치한 것이 문제다. 주행 중 음료 혹은 물을 꺼내기 위해서는 최대한 팔을 뻗어야 한다. 이때 어쩔 수 없이 몸이 기울기 때문에 자칫하면 위험한 순간이 연출될 가능성이 있다.
이 부분을 제외하면 실내 공간의 만족도는 꽤 높은 편이다. 곳곳에 마련된 수납공간을 통해 작은 부피의 짐을 쉽게 적재할 수 있는 것을 비롯해 1열에 적용된 릴랙션 시트 2열 리클라이닝 기능은 거주성을 높이는 요소다. 아울러 1열 헤드룸과 숄더룸, 2열 레그룸과 숄더룸이 넉넉해 성인이 탑승해도 불편함이 없어 보인다.
이 외에도 실내 V2L 기능과 스마트폰 무선 충전패드, USB C타입 충전포트 등 편의를 위한 다양한 사양이 적용됐다. 도어와 크래시패드, 콘솔 하단에 적용된 다이내믹 엠비언트 라이트는 속도에 따라 밝기가 달라지도록 설정할 수 있으며 드라이브 모드, 제한 속도 알림과 연동한 조명 표현은 재치가 돋보인다.
콤팩트 SUV이지만 트렁크 공간은 넉넉한 편이다. 후면 트렁크의 경우 VDA 기준 460리터(ℓ)이며 프렁크 용량은 25ℓ다. 여기에 2단 러기지 보드 및 러기지 언더 트레이를 적용해 트렁크 공간 활용도가 높다.
장거리에도 부담 없는 주행가능거리, 부드러운 가속감까지 더해
EV3의 주행 감각을 느껴보기 위해 서울 도심을 출발했다. 목적지는 속초. 서울에서 200킬로미터(㎞)쯤 떨어진 거리다. 사실 그간 전기차를 외면했던 이유는 장거리 이동의 불편함이다. 여기서 불편함이란 승차감 혹은 편의 기능의 부족함이 아니다. 바로 1회 충전 주행가능거리다. 한 번이라도 전기차를 경험해 본 이라면 공감할 부분이다.
불안한 기색에 얼굴에 드러났던 탓일까? 기아 관계자는 1회 충전으로 최대 501㎞를 주행할 수 있다며 안심시켰다. 확신에 찬 얼굴로 말하는 관계자 덕에 걱정이 조금은 사그라들었다. 걱정을 뒤로하고 서울을 빠져나갔다. 우려와 달리 EV3는 장거리 주행에도 부족함 없는 모습을 보였다. 출발 당시 계기판에 표시된 배터리 잔량은 93%였고, 주행 가능거리는 400㎞가 훌쩍 넘었다.
EV3의 첫 느낌은 매우 안정적이었다. 가속페달을 급하게 조작해도 촐싹거리며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대배기량 고급 세단과 비슷한 움직임이었다. 배터리가 바닥에 깔린 덕분에 승차감도 좋은 편이었다. 댐퍼는 부드럽게 수축·이완을 반복하며 노면을 대응했다.
고속도로에 올라 주행 모드를 스포츠로 바꾸고 가속페달을 끝까지 밀어 넣자 계기판 속 숫자는 빠르게 올라갔다. 이 와중에도 불안한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EV3는 150킬로와트(kW)의 출력과 283뉴턴미터(Nm)의 토크로 경쾌하게 바퀴를 굴렸다.
코너링 성능은 다소 부족한 모습이었다. 키가 높은 탓인지 롤을 어느 정도 허용하며 뒤뚱거렸다. 반면 브레이크 페달 감각은 약간 무른 편이었지만 제동 성능은 믿음직스러웠다. 배터리 무게로 인한 제동력 저하도 없었다. 이는 통합형 전동식 부스터 덕분이다. 특히 노멀과 스포츠 두 가지 브레이크 모드를 선택할 수 있도록 구성한 점은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최초로 적용된 아이페달 3.0의 활용성도 높았다. 가속페달만 조작해 가속과 감속, 정차까지 가능해 도심 주행의 편의성을 한층 높여줬다. 또 회생 제동 단계를 총 4가지로 구성해 취향, 상황에 맞게 사용할 수 있었다.
주행을 위한 배려도 가득했다. EV3는 내비게이션 기반 스마트 크루즈 컨트롤과 차로 유지 보조 2, 고속도로 주행 보조 2 등을 통해 스스로 차간 거리를 조절했다. 심지어 방향지시등 조작만으로 스스로 차로를 변경하고 터널 진입 시 열린 창문을 스스로 닫는 세심함까지 갖추고 있었다. 무엇보다 각 기능의 움직임이 매우 정교했다. 칼같이 차로 중앙을 지키고 차간 거리를 유지하는 능력이 뛰어났다.
서울을 등지고 달린 지 3시간쯤 후 시야에는 푸른 바다가 들어왔고 이내 내비게이션은 목적지에 도착했음을 알렸다. 총 주행거리는 195.4㎞. 전비는 6.6㎞/kWh였다. 남은 주행가능거리와 배터리 용량은 각각 약 300㎞, 59%. 직접 장거리를 주행해 보니 기아 관계자가 왜 확신에 찬 얼굴로 걱정하지 말라고 했는지 비로소 이해가 됐다.
EV3는 전기차에 대한 물음표를 느낌표로 바꿔 놓기 충분했다. 공간 활용성은 물론이고 다양한 편의 기능, 실내에 깃든 세심한 배려, 긴 주행가능거리, 넉넉한 출력 등은 분명한 매력이었다. 마치 EV3는 내연기관 성애자들을 전기차 세계로 안내하는 오작교와 같았다.
허인학 기자 ih.heo@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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