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 반도체 열풍이 반도체 시장의 정형화된 생산 공식을 뒤흔들고 있습니다. 전통적인 팹리스(반도체 설계)와 파운드리(위탁생산) 기업 간의 관계에선 미세공정 기술력이나 가격 경쟁력이 가장 중요한 고려 요소였다면, 향후 파운드리 기업의 경쟁력은 복잡다단한 AI 칩 공급망에서 얼마나 많은 우군과 파트너를 보유하고 있는 지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
2010년대만 해도 파운드리 업계에서는 ‘세계 최초’라는 타이틀이 가장 중요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글로벌 파운드리 시장 1위인 대만 TSMC와 2위인 삼성전자가 앞다퉈 최선단 공정 양산에 집중했던 것도 이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공식이 깨진 지 오래입니다. 3년 전 TSMC에 앞서 세계 최초 3나노 공정을 도입한 삼성전자가 아직도 고객사 확보에 골치를 앓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습니다.
특히 생성형 AI 서버에 탑재되는 칩이 초고성능 구현을 위해 2.5D(차원), 3D 패키징 방식으로 생산되기 시작하면서 설계, 파운드리, 메모리 등 각각의 기술 영역이 융합되는 추세입니다. 칩 설계, 제조의 복잡성이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졌고, 발주사가 원하는 AI 애플리케이션도 천차만별로 다양해지며 기존의 정형화된 방식으로는 고객사 수요에 발빠르게 대응하기가 어려워졌습니다.
◇ 분업화된 반도체 산업, 대융합의 시대로 전환
기존 중앙처리장치(CPU) 기반 컴퓨팅 시스템은 로직칩(CPU, GPU, ASIC)과 메인메모리(D램), 스토리지(SSD, HDD) 등으로 산업이 분리돼 있었습니다. 하지만 생성형 AI 열풍과 함께 로직 다이에 메모리를 적층하는 2.5D 패키징 기술이 도입되기 시작하면서 이 같은 공식이 서서히 분해되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TSMC는 자사 2.5D 패키징에 ‘CoWoS’라는 브랜드를 붙이고, AI 반도체와 고대역폭메모리(HBM)를 하나의 칩에 집적하는 공정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메모리 반도체 기업과 파운드리 기업의 협업이 중요해졌다는 얘기입니다.
제조뿐만 아니라 설계 영역에서 ‘뱃사공’이 많아졌습니다. 과거에는 아마존, 구글, 메타, 마이크로소프트(MS)와 같은 빅테크 기업이 팹리스에 원하는 사양의 칩을 주문했다면, 지금은 빅테크 기업들이 AI 칩 설계의 20~30% 수준을 직접 담당할 정도로 전문성이 높아졌습니다. 그만큼 각 사가 원하는 AI 반도체의 기능, 전문화된 애플리케이션이 급증하고 있고, 이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팹리스, 파운드리 등이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르네 하스 ARM 최고경영자(CEO)는 최근 열린 삼성파운드리포럼에서 “2개, 4개, 또는 8개의 CPU를 하나의 시스템에 통합하는 기존 고객사의 요구는 이미 정형화된 방식이 있지만 (AI 서버처럼) 128개의 CPU가 신경망을 비롯해 메모리 구조에 연결된 시스템온칩(SoC)을 구축하는 건 많은 변화를 요구한다”며 “지난 1년 동안 우리는 이미 복잡해진 SoC에 더 많은 것을 원하는 고객사들의 수요를 보게 됐다”고 말했습니다.
회사마다 제시하는 설계와 칩 제조 과정이 다르기 때문에 파운드리 기업 입장에서는 일일이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사업의 복잡성이 높아졌습니다. 파운드리 회사들의 전략은 일종의 ‘설계언어’ 생태계를 구성하기 시작했습니다. 고객사의 설계 요청을 최대한 단순화, 효율화하기 위한 전략입니다.
TSMC의 경우 설계와 제조를 블록처럼 구성하는 ‘모듈형’ 전략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TSMC는 지난해 ‘3D블록스(blox)’라는 새로운 설계언어를 출시했는데, 이는 반도체의 물리적 구조와 연결 구조를 융합하는 하향식 설계 방식입니다. TSMC는 이 설계 생태계에 EDA(설계자동화), 검사, 팹리스 등 다양한 기업들을 끌어들이고 있습니다. 삼성전자 역시 지난해 12월 자체 시스템 설명 언어인 ‘3DCODE’를 내놓으며 설계 의뢰를 최대한 빠르고, 효율적으로 이해하고 소통하기 위한 플랫폼을 내놓기도 했습니다.
◇ 실전 돌입한 인텔, TSMC… 삼성은 아직 ‘연습게임’
파운드리 자체적으로 개발하기 힘든 차세대 기술의 경우 팹리스의 리더십에 기대야 하는 상황도 있습니다. 가령 실리콘 포토닉스, 공동 패키지 광학(CPO)과 같은 선행 기술의 경우 고속 컴퓨팅 기술을 위한 차세대 기술로 브로드컴, 엔비디아, 인텔 등의 기업들이 기술 리더십을 선도하고 있습니다.
실리콘 포토닉스는 ‘반도체 기술 혁명’으로 불리는 차세대 기술로, 기본 반도체 신호 전달 방식을 전기에서 전자·빛으로 구현한 광자(Photon)로 바꿨습니다. 광자를 활용하면 이론상 데이터 전송 속도를 기존 대비 수십 배 이상 빠르게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데이터 최대 전송 거리, 전력 효율성 등도 향상시킬 수 있습니다. 특히 데이터 전송 속도와 전력 효율성이 중요한 생성형 AI 서버에 적용될 경우 커다란 이점을 누릴 수 있습니다.
TSMC는 실리콘 포토닉스 기술력을 확보하기 위해 해당 분야에서 가장 앞서 있는 것으로 평가받는 브로드컴을 우군으로 끌어들였고, 엔비디아와도 함께 연구개발 조직을 구성했습니다. 이르면 내년 하반기부터 생산을 시작한다는 방침입니다. 또 TSMC는 대만 신주에 위치한 소재 선행 연구팀을 중심으로 3~4년 전부터 기초연구를 진행해 이 기술을 CoWos에 응용할 것으로 관측되고 있습니다.
인텔의 경우 인수합병(M&A)를 통해 실리콘 포토닉스 기술을 지속적으로 강화해 왔으며 세 기업 중 가장 빠른 속도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반도체업계 관계자는 “인텔이 지난 2017년 153억달러(21조원)에 인수한 모빌아이를 통해 바로 양산 가능한 수준의 실리콘 포토닉스 기술을 확보했고, 뉴멕시코에 양산 가능한 미니 라인을 5년 전 구축해 놓았다”고 설명했습니다.
삼성전자 역시 나름대로 선행 연구개발을 진행하고 있지만, 전체적인 기술 개발 과정을 리드할 만한 파트너 회사를 찾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현재 삼성은 자체 인력과 내부 소스를 바탕으로 실리콘 포토닉스, 후면전력공급(BSPDN) 등 미래 기술 개발에 투자하고 있습니다. 인텔과 TSMC가 명확한 기술 목표와 응용처, 양산시점을 정하고 실전에 돌입했다면, 삼성전자는 아직 ‘연습게임’을 반복하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삼성전자의 한 고위 임원은 “실리콘 포토닉스를 비롯해 2나노 이후 필수 도입 기술로 꼽히는 후면전력공급(BSPDN) 등의 개발 과정에서 함께 로드맵을 만들어갈 파트너 또는 제품이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지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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