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정자’라는 말을 제 이름 뒤에서 떼려고 한다.”
최민희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해 3월 야당 몫으로 방송통신위원회 상임위원 후보로 추천됐지만, 8개월여 동안 임명되지 못하고 자진사퇴하며 이같이 말했다.
지난해 8월 말 이동관 방통위원장이 취임했지만, 비슷한 시기에 김효재(여당 몫)·김현(야당 몫) 상임위원의 임기가 만료된 상황이었다. 그런데 민주당이 “들러리는 서기 싫다”며 후임자 추천을 하지 않자, 국민의힘에선 “야당의 직무유기로 방통위 2인 체제가 시작됐다”고 들고 일어났다.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싸움이 시작된 순간이었다.
합의제 기구로 출범한 방송통신위원회의 병폐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방통위는 위원장을 포함한 2명을 대통령이 지명하고 국회가 추천하는 3명(여당 1명, 야당 2명) 등 총 5인 상임위원으로 구성된 합의제 기구다. 하지만, 현재는 사실상 식물상태나 다름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지난 2일 김홍일 방통위원장이 국회 탄핵안 보고 직전 자진 사퇴를 하면서 문제의 심각성은 정점을 찍은 상황이다. 김 위원장은 전날 퇴임사를 통해 “지난해부터 국회가 방통위 탄핵소추를 두 번이나 추진하고 위원장이 사퇴하는 작금의 현실이 정말 불행하고 안타깝다. 이번 저의 물러남이 반복되는 혼란과 불행의 마지막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전했다.
안정상 중앙대 커뮤니케이션과 겸임교수(전 민주당 정보통신·방송미디어 수석전문위원)는 “합의제 기구 정신은 사라진지 오래”라면서 “물론 정당 추천을 받으면 정치색을 아예 안 띌 수는 없겠지만 어느 정도 전문성은 있어야 방송과 통신에 대한 규제 기능과 역할을 제대로 해야 하는데, 정치권에서 선정해 집어 넣으면 정치적 논객 싸움이 벌어지는 것 밖에 더 되느냐”고 했다. 그는 이어 “(방통위가) 국회의원 출신을 집어넣어서 휴식처로 간주하는 게 아니냐는 비판도 많다”면서 “근본적으로 3(대통령 2명·여당 1명) 대 2(야당 2명) 구조를 바꾸지 않으면 (지금과 같은 혼란이) 계속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현 정부 들어 방통위는 파행운영을 거듭했다. 전 정부에서 임명된 한상혁 전 위원장이 지난해 5월 30일 면직되면서 김효재 전 방통위 상임위원이 방통위원장 직무대행을 맡았다. 그러나 임기가 만료되는 지난해 8월 23일까지 신임 위원장이 오지 않아 결국 이상인 부위원장이 직무대행을 맡았다. 이후 약 일주일 만에 이 전 위원장이 왔지만, 방통위는 2인 체제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럼에도 YTN 최대주주 변경과 지상파 방송사 재허가 심사, 종편 재연장 등을 의결했다.
그러다 이동관 전 위원장이 지난해 12월 1일 자리에서 물러났고, 이 부위원장 직무대행 체제를 또 다시 맞이했다. 그러다 김홍일 전 위원장이 같은달 29일 임명되면서 한 달 만에 직무대행 체제를 벗어났지만 여전히 2인 체제로 운영됐다. 김 전 위원장은 이 전 위원장이 ‘보류’ 시킨 YTN 최대주주 변경을 허가했고 최근에는 MBC 대주주 방문진, KBS 등 공영방송 이사진 교체를 추진하면서 거센 비난을 받았다. 특히 야권에선 2인 체제에서 의결하는 게 부적절하다는 비판을 쏟아냈다.
그러나 이에 대해 다른 해석도 나온다. 김 전 위원장은 사태의 심각성을 따져 2인 체제 하에서도 최소한의 의결을 했고, 실제 최후의 보루로 ‘용산 압박 카드’를 남겨두고 있었다는 것이다. 업계 한 관계자는 “김 위원장이 경력 30년이 넘었는데 입법 취지를 모르겠냐”면서 “그 분은 오히려 자기가 책임질테니까 모든 사안을 보고 하라고 했다. 이사진 교체 등 해임건은 시급한 행정행위로 보고 진행시킨 것이고, 반면 대통령실이 압박한 유시춘 EBS 이사장 해임건은 의결하지 않고 있는 것 자체가 용산 압박이었다. 현재 2인 체제 방통위가 정상적 정책 의사결정을 하기엔 부적절하다고 봤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 전 위원장 역시 별다른 힘을 쓰지 못했다. 3~4기 방통위원을 지낸 고삼석 동국대 인공지능(AI)융합학부 석좌교수는 이번 사태에 대해 “‘3인(대통령 지명+여당 추천) 대 2인(민주당 추천)’ 제도가 문제냐, 사람이 문제냐 논란이 있는데 사실 둘 다 문제”라면서 “이런 제도로는 우리나라 정치 문화에선 절대 제대로 돌아갈 수 없다”고 지적했다. 그는 “정치적 공방의 대상으로 전락하여 제 기능을 못하고 있는 방송통신위원회를 해체하고 재설계를 고민할 때가 됐다”면서 “차라리 사법부처럼 권력이 손을 떼고 제4의 독립된 조직에 넘겨주는 방안까지 생각해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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