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업계가 인공지능(AI) 전쟁이 격화하는 시스템 반도체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총력을 쏟고 있다. 팹리스, 파운드리, 후공정 분야 기업 모두 저마다 생존과 제2도약을 위한 무기를 선택하고 도전장을 던진 상황. 17일, 국내 반도체 생태계 주요 기업을 찾아 경쟁력과 어려움을 들여다봤다.
◇엔비디아 잡을 ‘괴물신인’, 경쟁력은 ‘사람’
“저희 반도체는 엔비디아, 퀄컴의 제품보다 뛰어난 성능을 인정받고 있습니다. KT, 카카오 서버에 이미 적용됐고 현재 아마존, 구글 등 세계적 기업과도 적용을 논의 중입니다”
리벨리온의 경기도 분당 사무실에서 만난 오진욱 CTO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리벨리온은 국내 대표 AI 반도체 팹리스로 신경망처리장치(NPU) 설계 특화 기업이다. 지난 2020년 창업 이후 올 초까지 총 2800억원의 투자를 유치, 몸값이 8800억원까지 치솟았다.
이날 오 CTO가 직접 선보인 시연에서 리벨리온이 개발한 NPU ‘아톰’의 위력을 실감했다.
아톰은 전력 효율 측면에서 엔비디아의 A100 GPU를 크게 앞섰다. 이미지와 언어를 생성할 때 각각 전력을 92W, 74W 소모했는데 A100은 3, 4배 이상 많은 전력을 썼다.
리벨리온은 이미 지난해 열린 엠엘퍼프(MLPerf)에서 아톰으로 퀄컴·엔비디아의 동급 반도체보다 속도에서 1.4~3배가량 앞선 성적을 받았다. 엠엘퍼프는 구글·마이크로소프트, 스탠퍼드·하버드 등이 설립한 비영리단체 ML코먼스가 주관하는 세계 최고 권위의 반도체 성능 평가 대회다.
오 CTO는 “다양한 AI 추론 알고리즘을 가속하면서도 하드웨어의 파워와 속도 낭비를 최소화하는 것이 기술의 핵심”이라면서 “생산 과정에서 파운드리의 도움도 받았다”고 설명했다.
이어 “가격을 확정하지 않았지만 고객이 움직이려면 최소 30% 이상 저렴한 가격에 공급해 나가야 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리벨리온이 창업 5년 만에 이런 성과를 내는 원동력은 무엇일까. 오 CTO는 주저없이 ‘사람’을 꼽았다.
리벨리온의 전체 인력은 현재 120여명으로 오 CTO를 비롯해 90% 가까이가 엔지니어다.
오 CTO와 박성현 리벨리온 대표는 창업 거점으로 미국이 아닌 한국을 택했는데 이유는 인력수급때문이다. 언뜻보면 미국이 반도체 관련 인력을 확보하기에 더 유리할 것으로 보이지만 리벨리온에 필요한 인력은 한국에 더 많았다고 한다.
오 CTO는 “아키텍처랩에서 반도체 시스템의 방향성과 스펙을 결정하면 이것을 받아서 저전력으로 설계하는 고도의 기술 직업군이 따로 있다”면서 “분야는 다르지만 한국에는 세계적 제품을 만든 숙달된 엔지니어가 많은데 이런 인력은 미국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고 설명했다.
그는 다만, “한국은 엔지니어링 강점은 분명한데 엔비디아, 퀄컴 등의 방향성과 기술을 분석해 전체적 구조를 짜는 아키텍트 인력은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디자인하우스, 패키징도 AI 훈풍
팹리스 지원을 위해 성남시 판교에 구축된 시스템반도체설계지원센터를 찾았다. 스타트업이 AI 반도체와 연관 기술 개발을 진행하며 다양한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지난 2020년 산업통상자원부가 설립했다.
현재 14개 기업이 사무공간을 임대해 설계 프로그램 대여, 설계 검증, 계측, 시제품 제작 지원, 투자·마케팅 등을 제공받고 있다.
입주사인 시스템반도체 디자인하우스 기업 가온칩스를 방문했다. 가온칩스는 올해 1분기 매출에서 AI 프로젝트 비중이 54%까지 올랐다.
정규동 가온칩스 대표는 “AI 반도체의 급격한 성장을 체감하고 있는 중”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도 “중국은 자국에서 생산하는 반도체 40% 이상을 써야만 완제품을 출하할 수 있는 제도가 있다”며 “우리나라도 국산 반도체를 많이 쓰면 세제 혜택을 부여하는 등의 제도가 있다면 경쟁이 훨씬 수월할 것”이라고 말했다.
천안으로 이동해 찾은 하나마이크론. 이 회사는 반도체 후공정(OSAT) 국내 1위 기업으로 최근 AI 반도체 첨단패키징 기술 개발에 나서 다시 한번 큰 관심을 받고 있다.
하나마이크론이 개발에 나선 기술은 고대역폭메모리(HBM)를 비롯한 칩을 수평으로 연결하는 2.5D 패키징. 대규모 데이터 학습 추론에 특화한 반도체 패키지를 개발하는 데 꼭 필요한 기술로 여겨진다.
하나마이크론은 국책과제로 연구개발을 진행 중인데 올해 기술 개발을 마치면 내년부터 본격 프로모션에 나설 계획이다.
이동철 하나마이크론 대표는 “대만은 TSMC를 중심으로 후공정 기업들과 자유롭게 협력하고 있지만 우리는 AI 용 반도체 패키징 기술을 개발하는데 필요한 시제품도 구하기 쉽지 않았다”면서 “R&D에 필요한 시제품을 대기업으로부터 공급받아 기술개발을 진행 중인데 대만처럼 협력이 활발한 공급망관리(SCM)가 이뤄진다면 훨씬 좋은 성과들이 나올 것으로 예상한다”라고 말했다.
최호 기자 snoop@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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