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초 오너일가의 경영권 분쟁으로 논란을 일으켰던 한미약품그룹이 또 다시 그룹 내 주도권 문제를 두고 요동치기 시작했다.
주주총회를 통해 승기를 잡은 고(故) 임성기 창업주의 장·차남이 모친인 송영숙 회장과 동행하는 가 싶었으나, 차남이 송 회장과 결별을 선언하면서 갈등 봉합 한 달 만에 균열이 발생했다.
제약업계에 따르면 한미약품 지주사인 한미사이언스 이사회는 14일 임시 이사회를 소집해 송영숙 회장을 대표이사에서 해임했다. 이로써 한미사이언스는 차남인 임종훈 이사의 단독 체제로 전환된다.
임 대표는 지난 3월 정기 주주총회에서 형 임종윤 이사와 힘을 합쳐 경영권을 지켜낸 뒤 송 회장과 동생 임주현 부회장을 이사회에서 밀어내고 과반수를 확보했다. 이후 지난달 한미사이언스 이사를 통해 모친 송영숙 회장과 공동 대표를 맡기로 결정하면서 갈등이 봉합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이번 임시 이사회에서 차남 임종훈 이사가 송영숙 회장을 경영 일선에서 내쫓는 상황이 연출되면서, 일각에서는 한미약품그룹 내 또 다른 경영권 분쟁이 시작된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온다.
형제 승리 후 모친과 손잡는 분위기서 인사문제, 상속세 상환 논쟁 불거져
한미사이언스는 지난 3월 제51기 정기 주주총회를 통해 임종윤 전 사장이 추천한 5명의 후보를 이사진으로 선임하는 안건을 채택했다. 형제 측은 주주제안을 통해 임종윤·종훈 형제를 포함한 권규찬 DXVX(디엑스브이엑스) 대표이사, 배보경 라이나생명 감사위원, 사봉관 변호사 등 5명을 새로운 이사 후보로 추천했다.
주주총회 전까지 OCI그룹 찬성파 지분은 42.67%, 반대파는 40.56%의 격차를 갖고 있어, OCI와의 통합을 찬성하는 송영숙 한미약품그룹 회장과 임주현 부회장의 승리로 예측됐으나, 소액주주들을 비롯해 3% 가량을 쥐고 있던 기업 주요 관계자와 친인척들이 형제의 손을 들어주며 상황이 역전됐다.
형제 측의 손으로 옮겨간 한미사이언스는 4월 이사회를 열고 차남 임종훈 사내이사를 대표이사로 선임, 기존 대표였던 모친 송영숙 회장과 공동대표를 수행하게 되면서 갈등이 봉합되는 양상이었다.
하지만 임성기 창업주가 남긴 상속세(2644억원)와 주식담보대출(5379억원) 상환 등에 필요한 자금 마련 방안에 지속적인 이견을 보인 형제와 송 회장의 주장이 타협점을 찾지 못하는 상황이 지속됐다.
특히 최근 임종훈 대표가 단행한 임원 인사를 송 회장이 거부하기도 했다. 임 대표는 송 회장의 최측근 두 명을 해임하려 했으나 송 회장의 반대로 무산됐고, 두 사람간의 갈등이 다시 불거졌다.
한미일가에 정통한 관계자는 “새로운 한미약품그룹을 구축하기 위한 인사 문제부터 형제 측과 송 회장이 이견을 보이며 다툼까지 벌였다”며 “회사의 새로운 구축단계인 인사 문제도 제대로 논의하지 못하는 시점에서 상속세와 대출 상환 문제를 논의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고 설명했다.
형제 간 분열 조짐 보여…모친과 함께 가려는 장남 VS 모친 배제하려는 차남
결국 내달 한미약품 이사회가 결정되기 전 한미사이언스에서 투자 방법 이견을 보인 모친 송 회장을 배척하려는 시도가 발생하면서 경영권 분쟁은 새 국면을 맞게 됐다.
차남 임종훈 한미사이언스 대표는 송 회장과의 동행을 거부한 반면, 장남 임종윤 한미사이언스 사내이사는 안정적인 경영 타당성을 얻기 위해 송 회장과의 동행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임종윤 이사는 임시 이사회 소집을 반대했으나, 현 대표인 임종훈에 의해 이사회가 추진됐다.
특히 최근 임종윤 회장은 개인 최대주주인 신동국 한양정밀화학 대표와 상환에 필요한 자금마련을 모색, 스웨덴 발렌베리 가문 계열의 투자회사인 ‘EQT파트너스’와 계약을 논의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송영숙 회장을 비롯해 동맹이었던 임종훈 대표까지 정확한 진행상황을 공유하고 있지 않은 것으로 전해진다. 임주현 한미사이언스 부회장도 EQT파트너스와의 협의를 알지 못했다고 밝혔다.
현재까지 알려진 내용에 따르면 임종윤 이사와 신동국 대표는 한미약품그룹 오너일가가 소유한 한미사이언스 지분 50% 이상을 EQT파트너스에 매각, 1조원 상당의 자금을 확보하려는 계획을 구상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오너일가의 갈등 재연으로 지분 매각 협상은 수포로 돌아갈 가능성이 커졌다. EQT파트너스에게 넘기고자 했던 오너일가 지분에는 모친 송영숙 회장과 장녀 임주현 회장의 지분이 포함돼야 하지만 갑작스런 차남의 행동으로 단일 된 지분 매각이 불투명해졌기 때문이다.
내달 열릴 한미약품 이사회 통해 미래계획 공개할 임종윤 이사
오너일가 내부 갈등으로 인해 경영권은 당분간 현재의 창업주 가족 체제로 유지될 전망이다.
내달 임시 주총을 통해 새 이사진을 확정할 예정인 한미약품은 빠른 시일 내 이사회를 다시 열어 임종윤 사내이사를 한미약품 새 대표로 선임하는 등 한미약품그룹의 새로운 미래 전략을 공개할 방침이다.
임종윤 이사가 대표이사에 한미약품의 경영 최전선에 나서게 되면 회사는 영업부문 강화에 초점을 맞출 전망이다. 그는 한미약품을 국내 사업, 해외 사업, 제조, 마케팅, 개발 등 5개 사업부와 연구센터로 재편하는 이른바 ‘5+1’ 체제를 구상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위탁개발(CDMO) 수주 사업 강화도 예상된다. 임종윤 이사는 경영권 분쟁이 한창이던 3월, 기자간담회를 통해 다국적 기업인 스위스 ‘론자’를 롤모델 삼아 CDMO 사업 확장을 예고했다.
디지털헬스케어 부문도 힘을 싣는다. 이번 이사회를 통해 새로 합류하게 된 남병호 헤링스 대표가 디지털헬스케어 전문가로 알려져 있다. 남 대표는 국립암센터 임상연구협력센터장 등을 역임한 바 있으며, 임종윤 이사가 대표로 있는 코리그룹으로부터 투자받은 헤링스를 운영하고 있다.
임종윤 이사의 누이인 임주현 한미그룹 부회장은 연구센터를 담당하며 신약 개발 등에 주력하며 경영 일선에서는 다소 거리를 두는 방안이 검토된 것으로 전해진다.
한미 일가에 정통한 관계자는 “임종훈 대표가 형과 함께 경영권 싸움에 참가하면서 자신의 위치에 실망하고 권위를 높이기 위한 행동에 돌입한 것 같다”며 “장남보다도 송 회장과 가까운 사이었던 임종훈 대표가 모친에게 반기를 든 것이 상당히 이례적이며, 이번 사건으로 형인 임종윤 대표도 동생 임장을 신경쓰게 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김동명 기자 simalo@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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