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세대 고대역폭메모리(HBM)를 12단 구조로 만들어달라. 그러면 메인 벤더(공급사) 지위를 보장하겠다.”
10일 삼성 고위관계자에 따르면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는 지난해 삼성전자 경영진과의 만남에서 이같이 말했다. 그래픽처리장치(GPU)와 함께 짝을 이루는 HBM은 D램을 적층해 GPU 위에 2.5차원 구조로 붙이는 방식으로 탑재한다. D램을 12단까지 쌓아 초고용량·초고속 메모리 시스템을 구현할 경우 전체 인공지능(AI) 연산 성능을 극대화할 수 있다. 이에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AI 반도체 시장 최대 구매자인 엔비디아의 요구사항을 맞추기 위해 기술 개발에 속력을 내고 있다.
HBM 초기 시장 선점에 실패한 세계 메모리 반도체 1위 삼성전자는 5세대 HBM(HBM3E) 12단 제품을 SK하이닉스보다 3개월 더 빠르게 양산해 역전의 기반을 마련하겠다는 포부다. 삼성보다 먼저 HBM3E 8단 제품을 먼저 개발해 납품하고 있는 SK하이닉스를 제치고 엔비디아의 메인 벤더 자리를 꿰차겠다는 전략이다. 다만 삼성전자의 이 같은 양산 계획에 대해서는 전문가들의 의견은 다소 엇갈린다.
◇ 삼성전자·SK하이닉스, HBM3E 12단 레이스 시작
삼성전자는 지난 2월부터 HBM3E 12단 제품을 올 2분기에 양산할 계획이라며 자신감을 드러내고 있다. 메모리 반도체 업계에서 가장 빠른 로드맵이다. 이 같은 삼성전자의 자신감에 주가는 올 2월 말 이후 한때 17% 넘게 올랐다. 김재준 삼성전자 메모리사업부 전략마케팅실장(부사장)은 지난달 30일 올 1분기 실적 컨퍼런스콜에서 “업계 최초로 개발한 HBM3E 12단 제품 샘플을 현재 공급 중으로, 2분기 중 양산할 예정”이라며 “특히 36기가바이트(GB)의 고용량을 지원하는 12단 제품은 고단 스택의 강점이 있는 TC-NCF 기술을 기반으로 선도적인 제품 경쟁력을 갖췄다고 판단된다”고 강조했다.
현재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HBM의 핵심 공정인 실리콘관통전극(TSV) 프로세스에서 서로 다른 기술을 사용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 부분에서 차세대 HBM 생산 수율과 성능에 승패가 갈릴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김 부사장이 강조한 TC-NCF 기술은 칩을 하나씩 쌓을 때마다 필름형 소재를 깔아주는 방식으로, HBM이 고층으로 진화할수록 휘어지는 문제를 제어하는 데 강점이 있다. 반면 SK하이닉스는 TSV 공정 기법 중에서도 기술 난도가 높은 MR-MUF 공정을 HBM2E 4단부터 선제적으로 도입했다. 이 공정은 NCF보다 효율적이고 열 방출에 강하다.
삼성전자의 선전포고에 SK하이닉스도 당초 내년 초로 잡았던 HBM3E 12단 양산 일정을 앞당기며 적극적인 대응에 나섰다. 이번달 HBM3E 12단 샘플을 고객사에 제공하고, 올 3분기부터 양산에 돌입한다는 계획이다. 곽노정 SK하이닉스 사장은 지난 2일 기자간담회에서 수정된 양산 일정을 전하며 “갑자기 HBM 기술 경쟁력을 따라올 수는 없을 것”이라고 했다. SK하이닉스는 차세대 고층 HBM에도 MR-MUF 기술을 고수 중이다.
◇ 삼성전자·SK하이닉스, 공법 달라… 전문가들 우위 분석 엇갈려
반도체 전문가들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HBM3E 12단 조기 양산 가능성을 두고 의견이 분분하다. HBM3E 8단 양산까지 어려움을 겪은 삼성전자가 12단에서도 패키징 수율을 잡긴 쉽지 않을 것이란 의견과 함께 삼성전자가 우수한 재료를 확보했다면 충분히 역전이 가능할 것이란 의견도 있다.
권석준 성균관대 화학공학과 교수는 “8단 이상은 TSV가 핵심으로, 8단에서 양산 품질관리를 제대로 해본 적 없는 삼성전자가 12단에서 (SK하이닉스보다) 더 고난을 겪을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권 교수는 “(삼성전자가 사용하는) TC-NCF 계열은 원리상 여러 층으로 갈수록 유리하긴 하지만, 생각보다 패키징에서 수율이 잘 잡히지 않아 고단으로 가는 것이 쉽지 않은 상황”이라며 “MR-MUF를 채용한 하이닉스는 8단 이상에서도 비슷한 방법을 사용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권 교수는 “관건은 두 회사 모두 패키징 단계에서 고단으로 갈수록 접착 층의 품질 개선은 물론, 고단으로 이어진 메모리 모듈의 정보 입출구(I/O) 채널에 해당하는 TSV를 제대로 만들 수 있느냐가 될 것”이라고 했다.
유회준 카이스트 전기전자공학부 교수는 “3차원으로 적층하는 것 자체는 그리 어려운 기술이 아니지만, 이것을 더 얇게, 열방출이 잘되게 만들고 수율을 개선하는 건 어려운 일”이라며 “SK하이닉스는 MR-MUF 기술로 장점을 보여왔으나, 이 기술은 마이크로 범프를 사용해 낮은 단에서는 장점일 수 있지만 높은 단에서는 장점이 없다”고 말했다. 마이크로 범프는 고속도로의 인터체인지처럼 적층된 반도체와 TSV를 연결하는 가교 역할을 한다. 차세대 HBM일수록 범프 수가 늘어나 범프간 간격이 매우 좁아져 공정 과정에서 불량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유 교수는 “8단이나 12단을 쌓는 기술 자체는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에 삼성전자의 경우 우수한 NCF 확보가 관건”이라며 “이 재료에서 삼성전자가 자신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익명을 요구한 삼성전자 반도체 출신 한 교수는 “SK하이닉스는 열린 조직문화 덕분에 장비업체와 긴밀히 협력해 업계가 도입하지 않았던 MR-MUF 기술을 성공적으로 적용했으나, 삼성전자는 이런 새로운 협력 시도에서 실패한 셈”이라며 “SK하이닉스의 방식은 고단에서 한계가 있어 두 회사 중 열 방출과 수율을 잡는 데 누가 더 나은 소재를 확보했느냐가 향후 경쟁력을 좌우할 것”이라고 말했다.
SK하이닉스는 MR-MUF 기술이 고단으로 갈수록 한계를 보인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라고 일축했다. SK하이닉스 측은 “회사는 이미 어드밴스드 MR-MUF 기술로 HBM3 12단 제품을 양산하고 있다”며 “최근 어드밴스드 MR-MUF는 MR-MUF의 장점을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신규 보호재를 적용해 방열 특성을 10% 개선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결과적으로 어드밴스드 MR-MUF는 칩의 휨 현상 제어에도 탁월한 고온저압 방식으로, 고단 적층에 가장 적합하다”며 “16단까지 순조롭게 기술을 개발 중이며, HBM4에도 어드밴스드 MR-MUF를 적용해 16단 제품을 구현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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