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어린 시절 또는 젊은 시절을 보낸 자동차 애호가라면 방 벽에 멋진 차 사진을 붙여놓았던 기억이 있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친구들이 좋아하는 배우나 가수의 사진이나 책받침을 갖고 가슴 두근거릴 때 자동차를 마음에 두고 자동차와 함께하는 삶을 살겠다는 생각을 품은 사람들 말이다.
지난 수십 년간 많은 사람이 그런 차의 사진을 보거나 운 좋게 실물을 접하며 영감을 얻고 꿈을 키웠다. 이와 같은 꿈을 꿀 수 있었던 건 차량을 아름답고 강렬한 인상으로 구현한 자동차 업체와 디자이너들 덕분이라 할 수 있다.
겉모습만으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욕구를 자극하는 자동차는 흔치 않다. 매력을 발산하는 디자인의 차가 탄생하려면 디자이너의 감각과 표현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즉, 오늘날의 자동차 세상은 1970∼80년대의 드림카를 만든 업체와 디자이너들에게 적잖은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그 시절 젊은이들을 가장 열광하게 만든 대표 인물을 꼽으라면 이탈리아 자동차 디자이너 ‘마르첼로 간디니’를 빼놓을 수 없다. 3월 13일 8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그는 당대 이름난 디자이너 가운데서도 특별한 존재였다. 그가 디자인한 창의적이고 급진적인 표현들은 이후 다른 방식으로 응용돼 새로운 유행의 시발점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다른 디자이너들에게 영감을 주는 디자이너였던 셈이다.
간디니가 디자인한 유명한 차들로는 람보르기니 ‘미우라’와 ‘쿤타치’를 들 수 있다. 스포츠카 업계 후발 주자로 크게 주목받지 못했던 람보르기니를 세상에 널리 알리며 존재감을 키우는 계기를 만든 차들이다. 특히 쿤타치는 극단적으로 날렵한 쐐기 형태에 아름다운 곡선을 넣고 선과 면이 균형 있게 어우러지는 모습과 앞을 향해 들어 올려 여는, 이른바 시저(가위형) 도어가 파격적이었다. 쿤타치의 디자인은 그 뒤로 나온 모든 람보르기니 V12 엔진 스포츠카 디자인의 기준점이 돼 지금까지도 영향을 주고 있다.
미우라와 쿤타치 외에도 초기 람보르기니가 만들었던 에스파다, 하라마, 우라코 등 여러 양산 모델과 마르찰, 브라보 등 콘셉트카 디자인도 그의 손에서 나왔다. 쐐기형 차체에 항공기 스타일 앞 유리를 결합한 디자인이 돋보인 란치아 스트라토스 경주차나 세련미가 돋보인 알파 로메오 몬트리올 같은 차들은 당대 다른 차들과 뚜렷하게 구분되는 개성과 매력으로 호평을 얻었다.
때로는 틀에 박힌 자동차 업체 경영진의 시선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제안으로 외면받기까지 했다. 람보르기니가 크라이슬러에 넘어갔던 시절의 디아블로나 부가티가 폴크스바겐그룹에 인수되기 전에 나온 EB110 같은 초고성능 스포츠카들이 대표적이다. 두 차 모두 초기 디자인은 간디니가 했으나 양산차를 위해 최종 확정된 디자인은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디아블로를 위한 초기 디자인은 나중에 소규모 스포츠카 업체인 치제타가 내놓은 V16T로 부활했지만 생산된 차는 많지 않았다.
물론 그런 가운데서도 호평을 받고 시장에서 성공을 거둔 차들은 있었다. 1982년부터 12년간 230만 대 이상 판매된 시트로엥 BX, 1984년에 선보인 소형차 르노 5 2세대 모델 등은 그가 스포츠카뿐 아니라 대중 차 소비자들도 만족시킬 수 있음을 입증했다. 또한 그가 디자인한 르노의 대형 트럭 매그넘은 혁신적 스타일로 트럭 디자인의 흐름을 바꿔놓았다. 1990년에 출시된 매그넘은 1991년 ‘국제 올해의 트럭’ 상을 받았고 여러 차례 부분 변경을 거치며 2013년까지 장수했다.
직장인의 퇴직은 곧 은퇴를 뜻하지만 프리랜서는 죽는 날까지 현역이다. 간디니도 그랬다. 그가 주로 다룬 디자인의 대상은 자동차였지만 가구와 인테리어, 헬리콥터의 디자인에도 참여했다. 그는 올해 1월 이탈리아 토리노 폴리테크닉대학교에서 기계공학 명예박사 학위를 받는 자리에서 연설하는 등 일을 멈추지 않았다. 50여 년 전 그가 선보인 디자인은 지금까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다. 그가 남긴 걸작들을 볼 때마다 자동차 애호가들은 그를 기억할 것이다.
류청희 자동차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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