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글라스를 쓴 여성이 도심을 걷고 있다. 카메라 각도는 계속 바뀐다. 광고 영상을 방불케 한다. 매머드가 눈 위를 달리는 영상은 영화라고 해도 믿을 정도다. 챗GPT 개발사인 오픈AI가 지난 15일(현지시간) 공개한 텍스트를 동영상으로 만들어주는 인공지능(AI) 시스템 ‘소라’(Sora)의 시연 영상이다. 간단한 글을 쓰면 영상으로 구현하는 방식이다.
‘소라’는 과거 동영상 생성 AI와는 질적으로 다른 모습을 보였다. 챗GPT의 등장에 맞먹는 충격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방송 현업인들과 전문가들도 전에 보지 못한 놀라운 프로그램이라고 입을 모았다. 콘텐츠 제작 장벽을 크게 낮추고 방송 제작 업무에도 변화를 초래할 것으로 전망된다. 상용화하기에는 한계도 있었다. 방송 현업인들과 전문가들에게 ‘소라’에 대한 견해를 물었다.
‘소라’를 접하고 든 생각은
<크리에이터 이코노미>의 저자인 안정기 작가는 “처음 접했을 때 충격적이었다. 퀄리티가 높아서 놀라웠고 반응이 폭발적이어서 인상적이었다”며 “기존 프로그램은 아이디어를 영상으로 옮기려고 하면 한계가 있었기에 실무에 적용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는데 ‘소라’는 그런 시대가 생각보다 빨리 올 수 있겠다는 생각을 갖게 했다. 고가의 장비나 기술이 없이도 고퀄리티의 영상을 만들 수 있게 해주는 시작점이다. 창작의 허들을 대폭 낮추는 데 기여할 것”이라고 했다.
유튜브 콘텐츠 제작업체 관계자 A씨 역시 “기존에 나온 서비스들을 보면 이미지를 토대로 머리카락 정도만 날리거나, 구름이 움직이거나 구도가 조금씩 바뀌는 정도만 보여줬는데 ‘소라’는 물리적인 구현, 카메라 각도까지 계산해서 보여주는 완전히 다른 AI”라고 했다.
방송사의 PD인 B씨는 “가장 놀라운 도약 중 한순간이라고 본다. 강아지 털에 묻은 눈이라든가 선글라스에 비친 도시의 풍경, 클로즈업된 눈에서 떨리는 근육과 눈썹의 경우 실제 촬영한 것이 아니라면 말이 안된다고 생각이 들 정도”라며 “카메라 워킹도 촬영 기법을 매우 많이 학습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앵글 역시 이상적인 사이즈와 각도로 제작됐고 핸드핼드, 드론, 지미집, 레일 등 적재적소에 필요한 촬영 기법이 보여서 놀랐다”고 했다. 그는 “이게 끝이 아니라 더 발전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기대 그리고 두려움이 공존한다”고 했다.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까
방송 관계자들은 ‘소라’를 보면서 콘티 제작, 레퍼런스 등 초기 작업에 활용할 수 있을 거라고 전망했다.
유건식 언론학 박사(KBS시청자서비스부)는 “영상을 만드는 일이 엄청 쉬워질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드라마든 영화든 초기에 작업이 쉬워지겠다”고 했다. 그는 “콘티를 짤 때 생각하는 스토리를 빨리 보여줄 수 있다. 공감대가 훨씬 빨리 이뤄져서 작업 속도가 빨라질 수 있다”며 “내가 생각하는 드라마 촬영 장소가 있는데, 세트 디자이너가 얘기만 듣고 구상하는 것보단 어떤 이미지인지 보여줄 때 훨씬 구현하기 쉽겠다”고 했다.
B씨는 “자연 다큐멘터리나 예능 등에서 촬영 감독이 오랜 기다림 끝에, 운도 따라야 찍을 수 있는 경이로운 순간의 자연 인서트 컷을 ‘소라’를 통해 제작해서 넣어도 모르는 사람이 대다수겠다는 생각도 했다”며 ‘소라’ 시연 영상을 처음 보는 순간 굉장히 많은 비용을 주고 인서트 컷을 샀다고 하던 예능 프로그램 PD들의 표정이 떠올랐다고 했다. 그는 “촬영에 대한 이해와 영상화에 대한 감각이 있는 시나리오 작가가 머지않아 혼자 단편 영화나 애니메이션을 만들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다른 방송사의 PD인 C씨는 “레퍼런스 찾기에 좋다. 평소엔 회의할 때 영화를 갖고 와서 세트장 레퍼런스 찾았다”고 했다.
방송 제작진의 역할이 달라질까
B씨는 “새로운 장르의 방송이 탄생할 수 있고 새로운 역할을 하는 PD도 탄생할 수 있다”며 “촬영 현장에 대한 개념이 사라질 수도 있을 것이다. 웹툰을 그리듯이 앉아서 결과물을 만들어 낼 수 있게 될 텐데 현장에서만 배울 수 있는 경험이 없어진다면 누구나 PD가 될 수 있는 시대가 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고 했다. 그는 “기획에 재능 있는 PD가 부각될 것이다. 또한 상상력이 뛰어난 PD가 ‘소라’같은 서비스를 마스터한다면 새로운 바람을 만들 수 있으리라 기대할 수 있겠다”고 했다.
유건식 박사는 “달라질 가능성이 있다”며 “스토리보드를 짜는 업무를 하는 전문 직군이 있다. 하나씩 그려서 짜는데 앞으론 작가가 직접 짤 수도 있겠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고난이도인 경우는 금방 대체하지 못 할 거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안정기 작가는 “AI를 활용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라는 새로운 직군이 등장하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기술을 잘 활용하는 PD와 편집자들이 더 각광을 받을 수밖에 없다. 새로운 기술들을 제작 시스템 안에 빠르게 도입할 수 있느냐가 중요해질 것 같다”고 했다.
일자리에 위협이 있을까
B씨는 “그래픽 디자이너, CG감독이 몇 주 걸려서 하던 작업들을 AI를 통해 몇 줄의 명령어로 만들 수 있게 된다면 가장 먼저 AI를 적용시키고 싶은 부분은 그 일이지 않을까”라며 “촬영감독, 미술감독, 조명감독, 편집감독 등의 스태프 또한 촬영 현장의 개념이 없어지면 당연히 일자리를 위협받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위기의식을 갖고 AI에 대한 공부를 열심히 한다면 AI 촬영 감독, AI 미술감독 등의 이름으로 완성도를 높이기 위한 또 다른 전문가가 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물론 지금처럼 많은 스태프가 필요하지 않을 것은 확실하다”고 했다.
안정기 작가는 “일자리 전반적으로 단순히 커뮤니케이션만 했거나 어정쩡한 기술을 보유한 사람들에겐 위협적일 수 있겠다”며 “AI 리터러시가 더 중요해진다. 잘 활용하느냐 못 활용하느냐에 따라 일자리의 질적인 차원이 달라질 것”이라고 했다.
방송사는 더 큰 위기에 처할까
A씨는 “방송사가 무너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콘텐츠 제작이 쉬워졌음에도 유튜브 상위권 영상을 보면 연예인이 출연하고, 자막이 잘 나오고 편집이 정돈돼 있다. 레거시 콘텐츠이거나 레거시 수준을 보여주는 콘텐츠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방송사의 콘텐츠는 여전히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고 했다.
안정기 작가는 “지금도 개인이나 작은 스튜디오에서 만드는 콘텐츠가 방송사보다 더 폭발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시대”라며 “이런 변화를 가속화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방송사들에게도 기회를 제공하는 것 같다”고 했다. 그는 “방송사는 이미 대규모 제작 인력과 시스템, 강력한 브랜드와 콘텐츠를 배포할 수 있는 다양한 네트워크를 확보하고 있다. 이런 요소를 잘 활용해 기존 방송의 틀을 넘어서는 고품질 콘텐츠를 더 빠르고 적절하게 만들 수 있다.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달렸다”고 했다.
한계는 없을까
A씨는 “상업적으로 도입되려면 허들이 남았다. 갈 길이 멀다”고 했다. 그는 가장 큰 한계점으로 ‘제어가 어렵다’는 사실을 꼽았다. “영상에 등장하는 피사체의 내용이나 구도를 대략적으로 요청했을 때 알아서 창작해서 구현해주는 방식인데 디테일한 제어가 어렵다. 특정한 부분에 대한 명확한 수정을 지시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 상업적으로 활용하려면 이런 것이 가능한 모델이 나와야 한다.” 구름의 위치나 인물의 모습을 조금씩 수정해서 요청하는 등 세부 조정이 어렵다는 것이다.
안정기 작가는 “당장 몇 달 만에 모든 걸 대체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창의성, 감정의 끝단까지 가는 깊이, 그리고 한 사회의 문화적인 맥락을 담아내는 콘텐츠는 여전히 아직은 인간의 고유한 영역”이라며 “다만 이런 것들을 AI의 구현력을 보태서 어떻게 잘 활용할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고 했다.
B씨는 “진짜 사람의 순발력과 말, 행동의 뉘앙스에서 웃음과 감동을 줄 수 있는 ‘예능’에 AI가 적용되기까지는 시간이 많이 필요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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